우리가 서로에게 “미처 몰랐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가야트리 스피박 <다른 여러 아시아>를 읽고

by 정상순


‘혜자’이야기를 해야겠다. 배우 김혜자 이야기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이야기. 사실 배우 김혜자가 아니었다면 이 역할을 누가 했을지 전혀 상상력 가동이 아니되는 상황이기도 하니 어쩌면 그 이야기. 정확히 말하자면 작년 봄에 종영한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혜자’ 얘기다. 혜자는 오지라퍼다. 모래 사장에서 우연히 손에 넣은 시계를 전면에 내세워 갖은 오지랖을 떤다. 그 정점은 아빠의 사고를 돌이키기 위한 사투다. 혜자는 아빠를 잃지 않기 위해 과거를 골백번 횡단한다. 아빠는 살아나지만 과거를 지나치게 자주 횡단한 대가는 혜자가 치러야 한다. 부모보다 늙어버린 혜자는 철없는 오빠에게 몸으로 겪은 등가교환의 법칙을 설명한다. 늙어버린 혜자가 경험하는 세계는 한 마디로 ‘미처 몰랐던 세계’다. 늙어버린 혜자는 젊었을 때 알지 못했던, 이해하지 못했던, 아니 이해할 필요가 없었던 세계를 알게 되고 수용한다. 때문에 요실금 방지 패드를 착용하기 주저하는 ‘샤넬 할머니’와 함께 자신에겐 필요치 않은 패드를 함께 착용하고 “우린 날씬해서 티도 안나요.”라며 샤넬 할머니의 팔짱을 낀다. 혜자의 욕망은 ‘나는 아직 요실금 패드를 착용할만큼 망가지지 않았어.’라며 진정 망가지는 것으로 추락하지 않고, 샤넬 할머니의 난감함을 당당함으로 역전시키는데 소용이 된다. 스피박의 말을 빌리자면 ‘욕망의 재배치’다.

실은 나는 올해 여름에도 욕망이 재배치되는 순간을 목격했다. 정의당 위원들의 현충원 참배길, 배복주 위원의 휠체어를 막아 선 계단 앞에 배복주 위원과 나란히 선 장혜영, 류호정 위원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이 그랬다. 더 오래전에도 비슷한 장면을 목격했는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영화 속, 암 선고를 받고 점점 머리 숱이 적어져 가는 친구를 위해 함께 머리를 민 주인공이 자신의 머리를 쑥스럽게 매만지는 장면이 그랬다. 페이스북에서 본 어떤 아버지는 아들의 몸에 커다랗게 새겨진 점 보다 더 큰 점을 문신으로 자신의 몸에 새겨 넣었다. 수영장에 가길 꺼리는 아들을 위해서였다. 열거한 장면들의 공통점은 욕망의 축소나 금욕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욕망의 관성을 멈춰세우거나 다른 방향으로 굴절시켜 욕망의 결과를 공유하고 함께 누린다. 또한 이들은 피해자가 되는 것으로 주체임을 자처하거나 목소리를 키우지 않는다. 이들은 함께 하는 삶, 함께 누리는 삶의 묘미를 아는 이들이다. 미처 몰랐던 세계를 목도하고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않고 미처 몰랐던 그 세계를 환대하며 성큼 발을 내딛는 이들이다.

미처 몰랐던 세계는 천지에 널려 있다. 처음 만난 청각장애인이 내 입을 뚫어지게 보는 이유가 입모양을 읽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책상은 있는데 의자가 없는 교육장, 그 공간이 비워져 있는 이유는 휠체어가 들어오기 위해서라는 걸 3년 전만해도 나는 미처 몰랐다. 2년 전 세상을 떠난 해리가 하루 2번의 산책이 꼭 필요한 존재라는 걸 아주 오랫동안 미처 몰랐다. 악다구니를 쓰며 호객행위를 하는 둘레길 민박집 어머님들이 하루 종일 밭일을 하고 받는 일당이 2만원이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베트남에서 온 **엄마가 학교에서 발행하는 가정통신문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미처 몰랐다. 미처 몰랐던 세계가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이제야 비로소 몰랐던 세계를 기웃거리고 있지만 아직 어떻게 해야 그 세계로 들어가 함께 누리는 삶의 묘미를 맛볼 수 있을지 나는 아직 모른다. 인간이 아니었던 여성의 삶을 설명하고 증명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서사가 필요했던 것처럼 나는 내가 미처 몰랐던 세계를 환대하기 위해 더 많이 궁금해해야 하고 그 세계를 하나의 덩어리로 퉁치지 않아야 한다. 더 많이 “미처 몰랐어.”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충분히 미처 몰랐던 세계를 인정하고 수용한 후에야 나는 혜자처럼 결심하고 행동할 수 있을 테니까. 미처 몰랐던 그 세계에서 또 다른 이들과 함께 눈이 부시게 지는 놀을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혜자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야 우리는 또 미처 몰랐던 새로운 이야기를 알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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