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호의 '제발' 그리고 기억들
1985년. 나는 중3이었다. 그해 5월 나는 종각과 허리우드(헐리웃이나 할리우드가 아닌) 극장을 지나 종삼과 종오 사이의 파고다 소극장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국민학교 동창이지만 각기 다른 중학교로 배정받은 절친 1호와 함께였다. 허성욱이 손가락을 떨며 멜로디혼을 연주하는 장면을 목도한 것이 그해 5월의 일이었고, 공연 막바지 앙코르 송으로 '제발'을 들은 것은 초겨울의 일이었다. LP를 테이프로 복사해 플러스펜으로 되감기하며 선생님 말씀 대신 들국화 1집을 경청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텅 비어있던 내 머리는 1집을 통째로 들어앉히기에 안성맞춤이었기에 공연장에 갈 때마다 전인권의 목청에 뒤질세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전곡을 따라 불렀다. 물론 허성욱이나 최성원이 마이크를 잡으면 분위기 파악을 했다.
들국화 음반을 들을 때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공간은 책상 밑이었고 가장 맞춤인 자세는 무릎 세워 쪼그려 앉기였다. 지금은 80년대를 재현하는 드라마에나 등장할 법한 무겁고 두툼한 헤드폰으로 머리를 바싹 조인 채 '그것만이 내 세상'을 듣는 순간은 문자 그대로 그것만이 내 세상이었다. 오른쪽 왼쪽 스피커를 번갈아 울리는 '세계로 가는 기차'의 기차 달리는 소리는 헤드폰을 썼을 때만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이었다. 파란 하늘이 있다는, 그래서 나는 아름답다는 '더 이상 내게'는 중2병은 없었지만 사춘기는 왕성했던 내게 '더 이상'일 수 없는 시이자 선언이었다. "난 노래할 거야.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행진의 이 가사를 따라 부를 때마다 1집 수록곡인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는 최성원이 행진을 작곡하면서 한방에 만든 게 틀림없다며 절친 1호와 시시덕대곤 했다. 같은 아파트 같은 통로에 살았던 절친 2호는 절친 1호의 계보를 잇는 요즘 말로 찐 팬이었다. 나의 청소년기를 관통하며 해체와 재결합을 반복하던 들국화는 89년 마침내 해체 콘서트로 종지부를 찍었고 그 자리에서 나는 절친 2호와 오열했다.
29호가 부른 '제발'은 2집 수록곡이었다. 29호가 노래를 마친 순간 나는 즉각 열다섯의 나로 소환되었다. 칭얼대고 읊조리는 '제발'이 아닌, 몸을 긁어내듯 절규와 포효사이을 오가는 '제발'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29호의 노래가 나를 소환한 자리는 파고다 소극장만이 아니다. 어젯밤 나는 중3, 고3 체력장, 800미터 오래 달리기를 하던 트랙으로 소환되었고, 야자시간 직전 주문한 쫄면을 한 젓가락에 흡입했던 교내 식당으로 소환되었으며, 영웅본색을 동시 상영했던 영동 극장으로 소환되었는가 하면, 무릎을 베고 누웠다가 귀 파주던 친구에게 고백을 받은 벤치로 소환되었다. 42.195킬로미터 마라톤이 아니라 800미터 오래달리기 중인데도 우리는 친구를 위해 트랙 안쪽에서 물병을 주고받으며 같이 뛰었고, 쫄면을 한 젓가락에 흡입하면서도 체하지 않는 철통 같은 위장의 소유자였으며, 열세 번째 영웅본색 관람으로도 성이 차지 않아 VHS 비디오를 워크맨용 테이프에 녹음하여 듣고 또 듣는 덕후들이었는가 하면, 갑작스러운 고백에 잠시 정자세로 앉아 나대는 심장을 진정시킬 줄 아는 청춘들이었다. 그 시절이 눈부셔 눈물이 났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 시간이 거기 그렇게 있어주어, 그 시간을 내가 기억할 수 있어 눈물이 났다. 그러나 내가 29호의 '제발'을 듣다가, 들국화 1,2집과 추억 들국화 앨범과 들국화 베스트까지 죄다 듣고도 잠을 청할 수 없었던 것은 지금껏 기억해내지 못한 다른 존재들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물통을 주고받으며 시끌벅적하게 나와 내 친구들이 트랙을 도는 동안, 조용히 묵묵히 혼자서 그 트랙을 돌았을 더 많은 같은 반 아이들이 떠올랐다. 도시락 세 개를 다 까먹고도 나와 내 친구들이 구내식당에서 쫄면을 흡입하는 동안, 집에 가서 밥을 먹고 다시 학교로 오곤 하던, 지금은 타워팰리스가 세워진 그 자리에 살던 한 반 친구가 떠올랐다. 워크맨과 마이마이를 도시락만큼 소중히 챙기던 그 시절, 단 한 번도 학교에 마이마이를, 워크맨을 가져오지 않은 더 많은 친구들이 떠올랐다. 고백과 연애편지를 주고받으며 살맛을 느끼는 사이,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만을, 교실 뒷자리에서 더 이상 나와 내 친구들이 사고 치지 않기만을 바랐을 더 많은 아이들이 떠올랐다. 어리다는 이유로 면죄되었던, 살피지 않아도 문제 되지 않았던, 그러나 마침내 타인에겐 박탈과 상실로 기억됐을지도 모를 내 환희가 떠올랐다. 배구공에 얼굴을 맞은 절친 3호에게 달려가 절친을 위로했던 나는 그 배구공을 내리쳐 의도치 않은 상처를 입힌 다른 친구의 표정을 기억하지 못한다. 앞에서부터 1등과 뒤에서부터 1등을 짝꿍으로 앉히던 야만의 시절, 앞문과 뒷문으로 각기 등수대로 입장하던 그날, 내 짝꿍의 표정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이게 다 29호 때문이다.
눈부신 시간이 거기 그대로 있어주어 눈물이 나기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있었지만 잊고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쭉 믿으며 살기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아무 문제가 없던 내가 들국화 음악을 듣다가 추억 팔이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냥 밤만 꼴딱 새워버렸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다 그냥 스르르 잠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대로 나이가 먹어버리면 어쩌나’, ‘잊고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삶을 계속 살면 어쩌나’ 내 눈물이 환희에서 한탄으로 바뀌게 된 건 다, 다 29호 때문이다. 29호의 '제발'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