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노동'분담'이 아닌 필수노동'횡단'이 필요하다

by 정상순

"눈이 많이 왔네요. 눈 치우러 나오세요~."


눈 오는 산골마을의 아침은 이러한 문자로 시작된다. 제설은 주로 남성들이 도맡아서 하는 일이지만 아침잠 많은 사람과 같이 산 덕분에, 이사온지 얼마 안 되어서는 미운털 안 박히려 굳세게 내가 나갔다. 성별분업에 거품 물고 이의 제기를 하며 살아온 터라 아마도 "눈 치우는 일은 왜 남자만 하는데?"와 같은 선제공격을 예방하기 위한 차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안(못) 나갔다. 몸이 먼저 일어나려 할 때마다 '나는 아픈 사람이다'라며 주입식 교육을 한다. 그런데 오늘 굳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일단은 귀농 20년 차의 짠밥 덕분일 것이고, 마을 속에서 할 일 하며 모나지 않게 살아온 덕일 것이다. 무엇보다 나를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공간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귀농 후 이사를 세 번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네 번째다. 첫 집에서 3년을, 두 번째 집에서 6개월을, 세 번째 집에서 10년을 살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6년 차다. 6년 전에 살던 집들은 모두 원주민 마을에 있었다. 시골은 단언컨대 남성에 최적화된 거주지다. 기본값 '남성'이 그 어느 곳보다 활성화되는 장소다. 때문에 마을회관은 늘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누워서 빈둥거리며 TV를 보는 거실 혹은 방 중심의 남성 공간과 그 남성을 위해 밥을 짓고 상을 차리는 여성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주방 공간. 귀농 후 첫 해는 누구보다 열심히 성별분업의 현장을 수용하며 살았다. 고무장갑, 호미, 목장갑, 앞치마 4종 세트를 상시 휴대하며 일손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임신, 출산, 육아의 기간 동안 마을에서 요구하는 성별 노동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시절 다른 결심을 했다. 다시는 그 성별 분업의 현장으로,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마을회관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나는 '나쁜 년'이 되기로 했다.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결심했을 때, 귀농인을 위해 특별히 조성된 마을인 이 마을에, 무엇보다 거대하고 으리으리한 집들의 크기와 구조에 나는 좀처럼 마음을 붙일 수 없었다. 그러나 원주민 마을 어른들께 작별 인사차 마을회관에 들렀을 때, 내 뒤를 이어 마을에 들어선 그다지 안면이 없는 다른 귀농인들의 시선을 감지했을 때 나는, 좀처럼 마음 붙이기 어려운 새 마을로 순간이동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의 후발 주자 귀농인들 특히, 당시 마을회관에서 식사 준비를 부지런히 하고 있던 여성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시선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코빼기 한 번 안 보이더니...' 죄송한 마음으로 고개를 조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이렇게 읊조렸다. '당신들도 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 그냥 나쁜 년 되세요.' 그로부터 6년이 흘렀고 지금은 거의 모든 마을에서 함께 식사를 해야 할 때면 식당을 잡는다.


마을 모임을 식당에서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일 할 사람, 밥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연령대가 젊은 우리 마을은 작년까지만 해도 마을회관에 모여 마을 행사를 치렀다. 각 가구에서 반찬 한 가지씩 준비해오고 마을 주방에서 밥과 국을 준비하는 정도로 애초에 시스템을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과한 성별노동분업에 대해 늘 지켜보는 눈들이 있었기에 건강한 시스템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지금은 노동 과잉 때문이 아니라 코로나 때문에 식사 모임에 제동이 걸렸지만.) 하지만 원주민 부락의 청년회 평균 연령은 60대를 웃돈다. 부녀회는 그 이상이다. 그나마 귀농인구 유입으로 젊은 이장 축에 끼는 사람들이 50대다. 둘러앉아 끼니를 나누는 정이 무엇인지 귀농 초기에 만끽한 나로서도 마을 모임 장소가 식당으로 이동되었다는 사실이 개운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늘 과부하가 되고 마는 그 노동의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또한 없다. 만약 밥 할 사람을 특정 성별로 지정해 놓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쩌면 지금과는 다른 장면을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모세의 기적이 아닌 , 분담이라는 미명의 착취가 아닌, 성별 노동의 분리가 아닌, 필수 노동에 대한 인지와 횡단이 가능했다면 우리는 지금 좀 더 다른 미래를 그려볼 수 있지 않았을까.


눈 오는 산골의 아침은 분주하다. 오줌통을 비울 수 없으니 오줌과 공기를 차단할 톱밥을 더 많이 준비해 놔야 하고, 밤새 눈 이불을 덮은 장작들도 말려주어야 한다. 반려견인 뭉치가 추위를 피할 공간을 준비해 줘야 하고 집 주변 통행로도 확보해 두어야 한다. 오줌통을 비워 말리고 땔감이 떨어지지 않게 장작을 미리 패고 난로에 쌓인 재를 긁어내야 한다. 이 모든 일들이 매일매일 규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올해 처음으로 알았다. 20년 차 귀농인이지만 그 일은 늘 나 아닌 다름 사람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다른 사람과 일 년을 떨어져 지내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우리는 각자의 일을 해왔음을. 그러나 이제 우리는 분리되고 분담되었던 경계를 넘나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를 증명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눈을 쓸러 나가고, 밥을 하러 나갔던 나는 이제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를 환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아침 눈으로 뒤덮인 산과 들을 바라보며 비로소 기억해냈다. 나는 20년 전 불편을 감수하기 위해 이곳에 내려왔다는 걸. 고대광실 같은 집에 살면서 불편을 감수한다는 말이 참 어색하기 짝이 없지만 어떻게든 에너지를 아끼고, 내 필요 때문에, 욕구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취하지 않고, 더불어 살고 있는지, 함께 걸어가고 있는지 살피고 싶다. 불편을 감수하겠다고는 했지만 실은 크게 불편하지 않고 즐거운 순간이 더 많다. 이 글을 쓰고 나서 나는 눈 산책을 나갈 것이고 느티나무매장에 들러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가 아닌 내 개인용기에 담긴 두부를 찾아올 것이며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뜨끈한 채수 국물에 국수 한 사발을 말아먹을 것이다. 나의 이런 일상은 또 누군가를 딛고 유지되고 있음을 잊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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