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온병과 기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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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상순


아이들과 거의 하루 종일 집에 '함께' 있다 보니 자꾸 규칙이 생긴다. '규칙은 없을수록 좋다'가 내 삶의 이정표이지만 '같이', '함께' 살려면 가끔은 약속과 규칙이 필요하기도 하니.


지난주 마을 친환경 매장에 들렀다가 동네 친구로부터 불현듯(진정 불현듯) 레몬차를 선물 받았다. 그 레몬차를 아이들이 정말 잘 먹는다. 겨울이니 코코아도 자주 타 먹는다. 특히 큰 애는 따뜻한 차 마시는 걸 좋아하는데 대부분 난로에 올려놓은 주전자로 말린 돼지감자를 끓여 먹지만 가끔은 일부러 다기를 꺼내 발효차나 연잎차를 우려 마신다. 차를 마실 때마다 전기주전자로 물을 끓인다. 물 양을 딱 맞춰 끓이기는 쉽지 않아 늘 주전자에 물이 남는다. 예전엔 그 물로 칫솔을 소독하기도 하고 싱크대를 닦기도 했지만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나 아이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보온병에 끓인 물을 담아 필요할 때 따라 마시기'. 그런데 ‘보온병'이라 쓰니 바로 '기저귀'가 떠오른다. 그래, 오늘 이야기는 보온병과 기저귀의 상관관계다.


첫 애를 낳고 천기저귀를 쓰던 15년 전, 수도를 틀면 바로 온수가 나올 수 없는 시골집의 구조상, 똥오줌 묻은 천기저귀를 처리하기 위해 보온병이 필요했다. 일회용 기저귀를 쓰지 않았으니 물티슈도 없었다. 물티슈 대신 코인 티슈(물을 묻히면 부풀어 오르는 티슈)를 사용했고 당시 구입한 코인 티슈가 지금도 다용도실 수납장에 남아 있다. 요즘은 싱크대나 가스레인지를 닦을 때 가끔 쓴다. 천기저귀를 쓰던 무렵엔 늘 집 한쪽에 대야와 보온병과 수건이 준비되어 있었다. 기저귀를 새 것으로 갈기 전, 작은 대야에 보온병의 따뜻한 물을 부어 아이의 엉덩이를 닦아주곤 했다. '그 불편한 일을 어떻게 한 걸까'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답할 수 있다. 실은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다고. 무엇보다 나는 바쁘지 않은 엄마였다. 도시에 사는 친구들처럼 출근과 동시에 아이들을 어린이집으로 이고 매고 뛰어야 할 의무가 나에겐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외출할 때마다 제 손으로 신발을 신을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었고, 온몸에 밥풀을 묻히고 국그릇을 휘저으며 밥을 먹어도 뒤처리 할 시간이 있었다. 아이들이 싱크대를 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잠금장치를 해놓지 않아도, 그래서 아이가 냄비며 롤 비닐이며 쿠킹포일을 죄다 꺼내 난장판을 만들어도 웃으며 사진 찍을 수 있는 여유가 내겐 있었다. 그러나 그 여유가 늘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니라는 걸 그땐 잘 몰랐던 것 같다. 나는, 귀농은 해놓고 천기저귀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자연분만은 해놓고 분유를 먹이는 사람들을, 잠시 쉬겠다고 세 살도 안 된 아이에게 뽀로로를 틀어주는 엄마들을 마음으로 질책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 마음의 소리는 내 몸의 경계를 넘어 어떤 형태로든 내가 목표로 삼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다시 보온병 얘기로 돌아가서.

정말 추운 겨울, 창문 틈으로 칼바람이 잘도 찾아 들어오는 한 겨울에는 욕실에서 아이를 씻길 수 없었다. 집에서 가장 따뜻한 공간에 목욕 대야를 두고 대야 양 옆에 보조 난방기구를 틀어놓은 채 아이 목욕을 시켰다. 목욕을 마치면 그 물로 아이 기저귀를 빨았다. 며칠 전, 지독히도 추운 집에 살았던 동네 친구 한 명과 당시를 회상한 적이 있다. 우리는, 칼바람을 가르며 아이를 키우던 그 시절을 추억하던 우리는 모두 웃고 있었다. 친구와 내가 15년 전의 추위를 넉넉함과 유쾌함으로 치환할 수 있었던 이유가 단순히 '라떼는 말이야'의 마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무언가에 빚지고 살지 않은 삶의 기억이 돌려준 환희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확실히 자연분만, 모유수유, 천기저귀 삼종 세트라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자 가해자였다. 어떤 기준으로도 강요되서는 안 될 행위를 마음속으로 강요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한 적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만큼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도 미워했다. 하지만 아마도 나는 많은 것들을 새롭게 배우게 될 것 같다. 같은 행위를 다른 마음으로 하는 일을, 낯선 것 같지만 퍽 익숙한, 익숙한 것 같지만 완전히 새로운 일에 임하는 마음을. 그래야만 '불편함을 감수하자'는 화석화된 문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해대는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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