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한 편지, 비로소 부칠 편지

-에코 그리고 페미니즘

by 정상순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쓴다. 이번엔 꼭 부쳐야지 싶은데 그럴 수 있을지.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될지. 그냥 좀 우리 서로 위로가 필요한 것 같아서.

궁금했어. 스무 해 전 너는 왜 그렇게 치열했을까. 뭐가 그렇게 널 분투하게 만들었을까. 근데 그 분투는 왜 분투로 그치고 말았을까. 전혀 몰랐던 건 아니잖아. 그치? 서울에서 알바하고 공연하고 그런 식으로 계속 살아가는 게 가능하지 않을 거라는 거, 더 많이 벌어야 하고 그만큼 더 많이 써야만 지속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거라는 거. 그래서 덜 쓰겠다고, 쓰레기를 덜 만들겠다고 내려왔고 비닐봉지 씻어 말리는 일로 하루를 시작해서 말린 비닐봉지를 거둬들이는 일로 하루를 마무리했지. 너는 그 때 옳았고 옳았으므로 도덕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어. 도덕적 우위는 결국 독주를 낳았고 혼자 뛰는 경기는 금방 쓸쓸해졌어. 손잡을 이가 없으니 결국 경기 종료.

네가 점점 힘에 부쳐했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 나. 아마 그 때였을 거야. 결혼을 하고, 배를 갈라 아이를 낳지 않기 위해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도록 걷고, 자연분만 후엔 모유수유와 천기저귀에 목숨을 걸고, 3년 동안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모성신화를 신화가 아닌 정설로 받아들이고.

특히 뱃속에 있던 아이의 기형아 검사를 권유받았을 때, 진통이 시작되고 유도분만제를 권유받았을 때, 아기 수첩에 기재된 예방접종을 권유받았을 때 넌 그 모든 제안과 권유를 물리쳤지. 근데 말이야. 네가 그 때 그 제안들을 거절했던 아니 거절할 수 있었던 힘은 뭐였을까. 아마도 아이의 장애를 이유로 뱃속 생명의 수용 여부를 결정하지 않겠다는, 불필요한 화학 물질(이물질)을 분만과정에 포함시키지 않겠다는,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건강과 안전을 담보로 삼지 않겠다는 의지였겠지.

그 때 너에게 더 많은 걸 요구하지 않았어야 했다는 걸 알아. 넌 이미 충분히 힘들었으니까. 시간이 흐르니, 그래서 돌아보니 좀 아쉬운 것들이 있어서 그저 중얼대고 있는 중이야. 그러니 내 말이 여전히 너에게 부담이 된다면 이쯤에서 편지를 덮어도 좋아.

아직 읽고 있니?
고마워.
그러니까 일종의 가정인데, 이런 거지. 만약 네가 기형아 검사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때, 장애를 수용하겠다는 윤리적 선택에 멈추지 않고 생명이어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선별하는 우생학의 그림자와 돈으로 불안을 잠식시키는 자본의 논리를 짐작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분만촉진제를 거부했을 때, 유도분만의 과정에 불순물을 끌어 들여 태아와 너 자신을 오염시키지 않겠다는 생태적 선택에 멈추지 않고 그 과정이 태아와 너 자신을 분리시키는 그래서 결국 양자 모두를 소외시키는 과정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이의 예방접종을 거부했을 때, 예방접종을 수용하는 일이 과잉 예방책이라는 판단에 멈추지 않고 검증되지 않은 백신의 실험지로 네 아이의 몸이 영토화 되어 가고 있다는 판단에 이르렀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너 한 사람의 선택, 결정에 의존하지 않고 자본주의라는 구조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너의 싸움은, 분투는 혼자만의 싸움이나 분투가 아니라 손 내밀고 내민 손을 맞잡아 주는 연대의 몸짓이자 화해의 축제는 아니었을까.

땅을 살리고 씨앗을 살리는 일이 여성으로서 네 몸을 소외시키지 않는 일이며 재생의 에너지와 재생산 권리/능력을 되찾는 일에 다름 아님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임출육 노동을 고된 노동으로만 여기지 않고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노동임을, 다른 노동의 가치에 견주어 하위에 속하는 노동이 아님을 좀 더 빨리 알아챌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리하여 임출육의 기간 이후에 찾아올 상대적 자유를 배우자 따라잡기에 허비하지 않고 캐롤 엠쉬윌러의 놀라운 소설 ‘애들’의 여성들처럼 남성들에게 “우리처럼 살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농민의 자가채종금지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일본 종묘법 개정과 최근 자궁경부암 백신 접종을 의무화 하자는 더불어 민주당 의원의 법안 발의는 다른 얼굴을 한 자본의 동일한 전략임을 더 빨리 눈치챌 수 있었겠지. 씨뿌리고 거둔다, 는 당연한 순환 논리를 지적재산권이라는 미명하에 간단히 제거하고 씨를 뿌리려면(재생산하지말고)소비자가 되라는 내부 식민지 전략이 일본 종묘법 개정의 실체임을, 토종씨앗을 그토록 구하기 힘든 이유가 농민들의 관리소홀이 아니라 내부식민지화 전략의 일환이었음을 더 빨리 더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겠지.

권리를 의무화 하여 자국민을 소비자로 삼는 자궁경부암 백신 접종 의무화 또한 내부식민지화 전략임을, 백신 공급처 확보와 효능 실험 및 검증이라는 두 마리 토끼 잡기임을 진작에 눈치챘겠지. 게다가 종묘법은, 자가 채취를 금한다는 일은, 실은 국가가 재생산권을 제한하고 기획하겠다는 당찬 포부임을, 백신 의무화는 국가가 몸을 특히 여성의 몸을 단속하겠다는 근대로부터의 기획임을 불 보듯 훤히 알아챘겠지.

나는 최근의 낙태죄 폐지를 비롯한 재생산권 논의가 종묘법 개정 반대 운동, 농민운동지형 등과 연대했으면 싶다. 이 연대는 실은 내가 너와 손 잡는 일이기도 하니까. 또한 기후위기와 농민주권상실을 논하는 운동의 주체들은 기후위기와 농민주권상실의 진짜 원인 -자연/제3세계/그리고 여성에 대한 식민화-에 주목하는 페미니즘적 인식을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게 바로 네가 나에게 손 내미는 행위일 테니까.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손을 잡을 테니까.

편지를 시작할 땐 이 편지를 다시 서랍 속에 넣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는데 오히려 마무리하려니 기운이 돈다. 오래 걸린 만큼, 돌아온 시간만큼 어쩌면 네겐 이 편지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네가 이 편지를 꼭 읽어줄 거라 믿어. 왜냐면 나는 이 편지를 꼭 너에게 부칠 거니까. 그게 우리가 손을 맞잡는 첫 순간이 될 테니까.

2020년 12월
내가, 20년 전의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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