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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상순 Jul 02. 2024

수영일기

2. 수영장 내 성별구도

수영장, 목욕탕, 화장실의 공통점은? 그렇다. 셋 모두 전형적인 성별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반드시 편입되어야 입장이 가능한 공간이다. 목욕탕이나 화장실과는 달리 옷을 하나 걸친다는 이유로 수영장은 차별화된다. 성별로 구분되었던 탈의실과 샤워실을 지나면 새로운 대통합의 공간 수영장에 당도하니 말이다.  


오늘은 강습이 없는 자수의 날. 오후에 일정이 있어 평소와 달리 오전에 수영장에 갔다. 우리 수영장은 25미터짜리 레인이 네 개 있는 아담한 수영장이다.  하나는 걷기 레인이고 가운데가 중급, 나머지 두 레인은 기초 레인인데 마지막 레인은 자유수영시간이 아닐 땐 강습레인으로 쓰인다.  세 번째 레인에서 측면호흡 연습을 하다가 강습이 끝났기에 마지막 레인으로 넘어갔다. 측면호흡과 팔 돌리기를 콤보로 돌리며 어푸어푸 첨벙첨벙 오디오를 재생하고 있는데 담당강사가 지나가면서 말한다. "호흡할 때 고개 들리면 안 돼요. 호흡하지 마시고 팔 돌리기만 하세요." 강사 시야에 들어갈 땐 팔 돌리기만 하고 강사 시야에서 벗어날 땐 측면호흡을 하며 얇실하게 연습을 지속했다. 지금은 강습 시간이 아니니깐. 강사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지만, 숨을 쉬기 위해 천장을 볼 때와 레인 뒤쪽을 볼 때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 몸으로 익히고 싶었다.  


여성강사가 담당하는 초급 1개월 반은 이미 킥판 놓고 측면호흡하기에 들어섰다. 남성강사가 당담하고 있는 같은 레벨은 이제 막 팔 돌리기를 시작했다. 진도를 빨리 빼는 건 내 목표가 아니니 문제가 될 건 없다. 다만 발차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팔 돌리기를 하기 시작하면 앞으로 나가는 속도가 달라져 동기부여가 되는 건 확실하다. 아마도 '잘 가르친다', '빨리 마감된다' 등의 칭찬이 여성강사에게 따라붙는 건 여성강사가 회원들의 요구와 욕구를 잘 캐치하기 때문인 것 같다.


강습이 끝났는데도 남성강사는 출수를 하지 않았다. 곧 한 여성회원이 입수를 하더니 일대일 강습이 시작됐다. 나와 같은 레인에서 자수를 하던 한 회원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여기 기초 레인 아닌가요? 지금 강습 중인 거 아니죠?" 우리가 입수해 있던 레인 데크엔 기초반 레인임을 알리는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사실 여성강사가 시위하듯 그 푯말을 세워놓고 가지 않았다면 나도 똑같은 질문을 누군가에게 했을지 모른다. 레인 반대편을 바라보니 그곳엔 여전히 '강습'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연습을 했다. 하지만 출수와 동시에 기초반 푯말을 불만 섞인 표정으로 세워두고 간 여성강사에게 가서 물었다. 


"남성 강사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 개인 강습이요?"

"네? 개인 강습 안 되는 건 줄 알았는데?"

"토요일은 괜찮아요. 근데 지금은..."


여성강사는 말을 아꼈지만 상황 파악은 어렵지 않았다. 남성강사는 자유수영 시간에 자유수영 레인에서 개인강습을 진행 중인 거였다. 여성 강사의 얼굴에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공간에서 완벽한 혼란을 겪고 있는 이의 피로함이 묻어있었다. 사실 이 수영장의 성별화는 탈의실과 샤워실에서 그치지 않았다. 남자 탈의실과 샤워실에는 남성 강사 외에 공간 관리를 위한 인력이 배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성의 공간을 관리하는 건 여성 강사의 몫이었다. 아니, 여성강사와 여성회원들의 몫이었다. 남성 탈의실과 샤워실이 임금을 받는 남성 인력에 의해 관리되는 동안 여성회원들은 물이 빠지지 않는 샤워실과 머리카락이 굴러다니는 탈의실을 너나 할 것 없이 쓸고 닦았다. 무임금으로, 공짜로. 


샤워실 타일 공사 불량으로 이미 시에 민원을 넣었더랬다. 문제제기의 표면적 핵심은 '노인 회원이 많은 수영장의 특성상 낙상 사고가 우려된다. 인건비를 아끼려다가 더 큰 비용을 치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완곡한 내용이었지만 물고 늘어질 안건은 그게 아니었다. 남성 샤워실과 탈의실에 배치된 관리 인력을 여성 샤워실과 탈의실에 배치하지 않은 이유, 여성의 노동을 공짜로 전유함으로써 수영장의 위생과 청결을 유지하고 있는 작태에 대한 해명이 필요했다. 현장 검증을 마쳤고 곧 인력을 보충하겠다는 답변을 받았지만 삼 주가 지난 지금까지 인력은 보충되지 않고 있다. 또 한 번의 민원이 필요한 순간일까.


그나저나, 내 담당은 남성강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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