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네트여, 눈을 뜨시오

-분배냐? 인정이냐? 를 읽고

by 정상순

일찌감치

나는 나의 ‘업적’으로 인해 칭송받았습니다.

누군가의 2세를 잉태했다는 이유로,

산고를 이겨내고 출산했다는 이유로,

어머니라는 이유로.


그보다 더 일찍이는

‘무시’당했습니다.

페니스가 없다는 이유로,

가슴이 나왔다는 이유로,

피 흘린다는 이유로.


자주, 내 ‘업적’에 대한 칭송의 조건은 ‘무시’였습니다.

어머니이기 위해 인간은 아니어야 했고,

모성과 맘충은 동일어이기도 했으며,

전업주부는 남편이 부양하는

비인간 여성의 이름이었습니다.


협상 테이블이 있었으나

한 번도 테이블에 앉지 못했습니다.

의자는 부서져 있었고

내 몫의 멀쩡한 의자는

협상 테이블 반대편에 앉아야 할 사람이 내다 팔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버지였으며

남편이었고

가부장제였습니다.


내 업적의 대가는 필연성에 매인 인간의 조건이었습니다.

내 노동의 대가로 수많은 사람들이 탁월성을 발휘했는데

(아마 당신도 그중의 한 명이겠지요)

그렇게 발휘된 탁월성은

집집마다 항아리를 하나씩 두고 있는 사람들의 영웅담을 만들었습니다.

밑이 빠졌으나 절대 새지 않는 항아리였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도 새지 않으니

그 항아리를 가진 자, 어찌

탁월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뒤늦게나마 ‘무시’를 인지한

-어머니이기 위해 인간은 아니어야 했고,

모성을 맘충이라는 호명으로 맞바꿔야 했으며,

남편이 부양하는

비인간 여성의 이름이 전업주부임을 인지한-

나의 동지가 여럿 있었으나, 그들 중 또 여럿은

종잣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대신

부서진 의자 말고 내 몫의 의자를 돌려달라고 소리치는 대신

밑 빠진 독 아니고 멀쩡한 항아리를 대령하라고 호통치는 대신

신 앞에 엎드려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였고

신으로부터 너 자신에게 이미 평화가 있다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던 또 다른 여럿은

남편 혹은 아버지가 떠난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종잣돈을 마련하여 밑 빠진 독을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밑 빠진 독을 채우기 위해서는

또 다른 밑 빠진 그러나 절대 새지 않는 항아리가 필요했습니다.

그 항아리는 엄마의 엄마이거나 엄마의 이모이거나

바다 건너 이국에서 달려온 3세계의 여성이었습니다.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발화하지 못한 채

차가운 비닐하우스에서 스러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업적’이 고국으로 돌아갈 온기 없는 시신으로 기려질 수 있을까요?

마트에서 7달러에 팔려나가는 닭을 키우고도

35센트 만을 손에 넣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는

양계업자의 자족하는 삶에서 이들의 ‘업적’을 찾아야 하는 겁니까?

자신들이 왜 물 부족을 겪어야 하는지,

그 물을 아보카도가 들이켜고 있으며

그 아보카도로 바다 건너 먼 나라의 식탁을 장식하기 위해

돈을 주무르기 위해

자신의 생명수를

‘착취’

하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알 수 없는

알지 못하는, 그래서 물을 배급해주는 사람들을 신처럼 받들며 사는

이들의 삶은 어찌합니까.


호네트여, 눈을 뜨시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일찍이 아내였을 때, 엄마였을 때, 그리고 며느리였을 때

나에 대한 칭송의 대가가 한 존재로서의 온전함에 대한 ‘무시’ 임을

나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 따위 칭송이, ‘업적’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개나 물어가라지)


봄은 곧 오겠지요.

그러나 봄이 그냥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나는 그 봄을 혼자 맞이하지 않을 거예요.

밑 빠진 독을 막아 줄 개구리(두꺼비던가)와 함께 맞이할 것입니다.

(갑자기 개구리)

아침 신문에 이런 뉴스가 실릴지 누가 압니까.

(상상을 해보자는 겁니다.

상상 없인 미래도 없으니까요.)

국가에서 집집마다 금개구리(두꺼비던가)를 주기로 했다고

금개구리(두꺼비던가)가 밑 빠진 독을 막아줄 거라고.

금개구리의 다른 이름은 ‘기본 소득’이라고.


그 봄이 좀처럼 오지 않는다 해도

나는 눈을 뜰 것입니다.

수많은 밑 빠진 항아리를 오매불망할 것입니다.

항아리들의 연대를 상상할 것입니다.

눈부시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눈이 비로소 번쩍 뜨일 만큼.

그러니 호네트여 부디

눈을 뜨시오.

나도 눈을 부릅뜰 테니.


덧붙이는 말 : 악셀 호네트와 낸시 프레이저의 공저이자 토론문인 이 책에서 호네트는 분배를 인정의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는 인정 일원론을, 프레이저는 분배 정의의 문제를 인정 투쟁론에서 독립시키는 분배-인정 이원론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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