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는 왜 차별적 언어인가
3년 동안 줄곧 외쳤다. 성교육 현장에서,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학부모' 아니고 '양육자'라고. 언어는 힘 있는 자들의 의사소통 도구다. 그래서 여성은 남성의 언어에서 독립된 언어를, 소수자는 다수자의 언어가 포함하지 못하는 고유의 언어를, 아픈 자는 정상성을 표준으로 삼지 않는 그들만의 언어를 갖길 원한다. 학부모라는, 어찌 보면 상당히 (양) 성평등적인 이 언어는 사실 지독한 차별적 언어다.
학부모가 왜 차별적 언어인지 가늠할 잣대는 많다. 학부모 이전에 '학부형'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차별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어머니는 집안일을 하고 바깥일은 아버지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아들)이 담당한다는 의식이 반영된, 가부장제의 정연한 줄 서기를 보여주는 언어가 바로 학부형이다. 가정 외 공간에 어머니(여성)의 자리를 아예 만들어 놓지 않았던 시대의 반영이다. 이른바 세월이 좋아져 아들을 탈락시키고 아버지 옆에 어머니를 나란히 놓은 결과 학부모가 되었다. 다행이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큰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대안교육공동체다. 작은 아이는 공교육 중등과정에 다닌다. 둘 중에 양육자라는 언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공간은 어디일까. 후자다. 최근 이곳의 학부모회는 '양육자모임'으로 변신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작은 아이가 다니는 중학교에는 한 마을에서 2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육아와 양육을 함께 해온 친구들이 '양육자'로 포진 해 있다. 또한 나는 마을의 초중등학교에서 양육자 대상 성교육을 맡게 되면서 이미 포진해 있는 이들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양육자라는 단어를 되풀이해 왔다. 그들이 새로운 언어를 수용한 결과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초중등 공교육 기관엔 '실제로' 학부모라는 단어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이들이 존재하며 이들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양육을 담당하고 있는 A가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함께 사는 B가 있다. 부모 이혼 후 한부모 가정에서 살아가고 있는 C가 있다. 이들에게 학'부모'라는 언어는 실체를 드러내지 못하는 개념어에 불과하다. 재작년의 일이다. 면단위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양육자 대상 성인지 감수성 교육이 있었다. '오늘 강의에서는 학부모라는 말 대신에 양육자라는 언어를 사용할 것이며 그 이유는 학부모가 모든 사람들을 수용해 내지 못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강의를 막 시작한 참이었다. 그때 교실 오른쪽에 앉아있던 한 남성이 손을 들었다. 그분의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네. 저도 한부모 가정의 아버지입니다. 늘 학부모라는 말만 듣다가 양육자라고 말씀해주시니 비로소 제가 부족한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으나 실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전에 얼마나 번번이 많은 것들을 삭제하면서 살아왔을까 하는 지점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큰 아이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양육자들을 서슴없이 '어머님', '아버님'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 학교에서 양육자 정체성보다는 연극 강사로 보낸 세월이 길기 때문에 내 호칭은 아직 '상순 샘'이다. '어머님', '아버님'이라는 호칭이 전달하는 따뜻함과 친밀함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 산골마을에서 '형님' 혹은 '언니'라 부르거나 불릴 때 만들어지는 연대감과 비슷한 것도 같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친밀함과 연대감의 정체는 사실 '힘'이다.
학부모가 일상적 언어인 공간에서, 아버님과 어머님이 거름망 없이 사용되는 공간에서 한부모 가정은 가시화되기 어렵다. 기혼이 정상성을 획득한 공간이라면 비혼은 살아있는 삶의 방식에서 번번이 누락되고 만다. 학교는 가정을 꾸려 자녀를 생산한 자들이 표준이 되는 대단히 규범적인 공간이다. 이곳에서 결혼을 하지 않고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상상력은 불경한 것이 된다. 기혼 무자녀 가정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미숙의 척도로 간주된다. 너무도 다양한 가족과 가정의 형태에 대한 상상력은 차단되고 삭제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1인 가구 비율은 이미 40퍼센트를 육박하고 있다.
그와 나 사이의 익숙하고도 친근한 호칭이 '힘'이 되지 않으려면, 그 힘이 누군가를 배제하는데 쓰이지 않게 하려면 더 많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 우리에게 '언어'가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