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스피러시와시스피러시를보고
귀농 직전, 여러 가지를 연습했다. 남들은 미용기술을 배우고, 옷 짓는 법을 배우고, 농사짓는 법을 배우며 참 귀농인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 나는 양동이 하나에 물 받아 목욕하기, 비닐 씻어 말리기, 통신기기 끊기 등등을 귀농 전 당면과제로 여겼다. 20년 전 다닌 지역 귀농학교에서 나는 고호의 별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했다. 하루는 학교 게시판에 <고호의 별의 양동이 목욕>이라는 글을 올렸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양동이 하나 가득 뜨끈한 물을 받아 온기가 빠지지 않게 샤워 커튼을 꼼꼼히 치고 목욕을 하는 순서 및 방법에 관한 가이드였다. 뜨거운 물을 솨~ 틀어놓고 샤워를 하거나 뜨끈한 물에 몸 전체를 담글 때 느끼는 노곤함은 없었지만 당시 나는 꽤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진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물을 아무리 아껴도 당신이 햄버거 하나를 홀랑 먹어버리는 순간, 내가 두 달 동안 샤워할 만큼 충분한 물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육식을 얘기하자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메탄가스 문제, 사료를 위한 대규모 곡물 재배 문제, 그로 인한 인류의 기아, 가축 배설물로 인한 해양 오염, 축산업을 위해 사라지는 열대밀림 이야기는 귀가 닳도록 들었다. 그러나 소고기 450그램을 생산하기 위해 9500리터의 물이 소비된다는 이야기에 나는 그야말로 배신감을 느꼈다. 한없이 평화롭고 소박하기 짝이 없던 양동이 목욕이 궁상맞고 청승맞은 도덕적 코르셋처럼 느껴졌다. 99년 그러니까 밀레니엄 직전까지 페스코로 살던 나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나를 더 옥죄는 방식을 택했다. 해산물을 끊고 계란을 끊었다. 그러나 암소의 자궁에 사람이 직접 수소의 정자를 밀어 넣어 수정을 시키고 송아지를 낳게 하고 그렇게 평생 임신 상태를 유지하여 얻는 생산물이 우유라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진 우유를 끊지 못했다. 식용을 위해 동물을 기르고 그 살점을 떼먹고 송아지가 소처럼 거대한 몸집을 갖기 위해 필요한 우유를 인간이 몸에 들이부은 결과 1만 년 전 1퍼센트에 불과했던 인류는 현재 98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98퍼센트 중엔 가축이 포함되어 있으며 99퍼센트를 차지했던 야생동물은 단 2퍼센트밖에 남지 않았다.
이상은 2년 전 카우스피러시를 통해 확인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바다는 어떨까. 중금속과 미세 플라스틱으로 인해 해산물 역시 안전지대에서 벗어났다는 점은 보편적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물고기 450그램을 잡기 위해 그물에 걸려드는 야생어류가 2킬로그램을 육박한다는 사실, 그러니까 새우 한 마리를 먹기 위해 우리는 다섯 종 이상의 다른 해상동물을 끌어올려야 하며 인간에게 불필요한 야생종은 바다로 되돌려지기도 전에 목숨이 끊어진다는 사실은 어떤가.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야 하는 연어들을 양식한 결과 하루 종일 어망 안을 뱅글뱅글 돌다 지쳐 상처 입은 연어를 다른 연어가 먹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가. 회색빛 살결의 연어에게 구미에 맞춰 색을 입힌 결과 입에서 살살 녹는 주홍빛 연어가 된다는 사실은 또 어떤가. 어망을 던져 바다 바닥까지 긁어내버리는 무차별 남획으로 인해 정작 소규모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섬사람들이 굶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가. 물고기 씨가 말라 내륙의 야생동물을 잡아먹기 시작한 이들에게서 사스와 에볼라와 코로나바이러스가 시작됐다는 사실은 어떤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의 기지 넘치는 인물 포오셔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서 살덩이를 떼어내시오. 단, 피는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되오.” 포오셔의 대사는 현대에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시스피러시는 상업적 어업 종사자들이야말로 인신매매의 피해자이며 망망대해의 어업 선박은 곧 인권유린의 현장임을 포착한다. 산사람이 바다에 던져지고 무차별 폭행과 감금에 시달린 선원은 포획한 어류와 함께 냉동고에 저장된다. 대규모 남획에 시달린 나라의 아이들은 굶주리고 포획된 어종은 부유한 나라 사람들의 배를 불린다. 마트에 깔끔하게 진열된 연어를 포장랩을 벗겨 입에 넣기까지 당신은 단 한 방울의 피도 손에 묻히지 않았다. 다짐육으로 카레용으로 손질된 소와 돼지 그리고 닭의 살점을 입에 넣을 때까지 당신은 웬만해선 동물들의 피를 손에 묻히는 일을 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샤일록이 포오셔에게 이렇게 답할 차례일까. "보시오. 저 동물의 사체를 먹는 이들은, 물고기의 시신을 입에 넣는 이들은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살덩이를 떼어냈소!" 나는 부디 포오셔가 샤일록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하길 바란다. "당신은 피를 손에 묻힌 도축장의, 상업적 어선의 저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동물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눈을 뜨시오. 샤일록!"
당신들도 포오셔의 일갈에 부디 눈을 뜨길 바란다. 나는 개인적으로 도살 장면을 전시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폭력도 어떤 목적을 위해 전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물에 대한 폭력을 여성에 대한 폭력과 등치 시키는 방식에 찬성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폭력을 전시하고 재현하지 않는 대신 다른 뭔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피해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지혜와 연대의 몸짓을 배운 것과 마찬가지로 무분별한 착취의 대상이 되고 있는 비인간 동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말해왔을 것이다. 고통을 호소해왔을 것이다. 착취당했던 이들이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듣는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시작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지속 가능한 연대를 위해 공감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살만한 세상이 다른 존재에게도 살만한 세상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비건으로 산다는 것은 상상력 충만한 삶의 다른 이름이며 초행성적 윤리의 현현이다. 함께 사는 삶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있다.
방금 접한 새로운 소식이다. 내가 낸 세금으로 축산업 활성화 보조금이 지급된다고 한다. 당신이 비인간동물의 살점을 그래도 먹겠다면 그토록 상상력 부족한 삶을 이어나가고 말겠다면, 나는 당신에게 내 세금 환급을 요청할 작정이다. 이제 고요하고 평화로운 비건 따인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