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밤새 오한이 왔다. 오한이었다고 생각했던 정동은 숫제 수치심이었을 테다. 수치심. 살아남았다는 수치심. 저녁상을 물리며 '오늘 하루도 잘 마무리하였다'라고 생각한 순간 부고가 날아들었다. 질문하는 자였으나 끝내 응답을 받지 못한 한 사람이 기어이 저물었다.
당신의 성별은 무엇인가?
당신은 그걸 언제 결정했는가?
당신 성별에 관해 할 수 있는 말은 얼마나 있는가?
당신의 성별이나 성 역할에서 싫거나 방해가 되는 점은 없는가?
당신 성별과 다른 성별의 특성 중에서 매우 마음에
들어서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 있는가?
그렇게 했다면 당신 인생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렇게 한다면 당신의 성별은 무엇이 되는 걸까?
사람들은 그런 당신에게 어떻게 반응할까?
그런 반응을 접할 때 당신의 기분은 어떨까?
-케이트 번스타인 지음, 조은혜 옮김 <젠더 무법자> 바다출판사
질문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질문거리로 삼았다. 혹독했고 치열했으며 간절했다.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질문의 대상으로 삼아 보지 않은 이들에겐 기이한 풍경이었을 테다. 질문하는 자의 질문하는 행위는 파문을 일으키며 뻗어나갔다. 그러나 그 행위는 타인만을 질문거리로 삼고 급기야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심판대에 올리는 오래된 습관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출구를 잃고 말았다.
"민간인 사망 소식에 따로 군의 입장을 낼 것은 없다."
입장이 아니라고 우기는, 응답이 아니라고 우기는, 야만의 입장이며 잔혹의 응답인 이 문장이 부디 질문하는 자의 귀에 닿지 않기 바란다. 밤새 뒤척이며 불면의 밤을 겨우 건너온 그대와 나는 기필코 이 문장을 바꿔낼 테니까. 질문하는 자의 성별은 권력에 의해 지정되었으며 다름 아닌 그 권력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서슬 퍼런 저 문장은 여전히 힘이 세다. 연민이라곤 없는 저 문장에 또 다른 질문하는 자를 다치게 할 수는 없다.
농구를 시작한 건 '남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어렸을 때는 열심히 운동하면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한 남자가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열심히 하면 할수록 성별 따위는 잊어버리고 농구의 매력에 빠졌고, 그래서 수술하고서도 계속 농구를 해왔다. 농구공을 들고 농구장에 가면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아줌마가 뭐 얼마나 하겠어?'라는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내가 슛하는 모습을 보고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같이 게임을 하자고 해서 같이 뛰면, 지독하게 부딪혀 오는 아줌마의 몸짓에 더더욱 놀란다. 물론 신랑의 말대로 요즘은 체력이 달려 예전만 못하다. 평생을 약으로 살아야 하는 이제는 더더욱 쉽지 않아 졌다. 어쨌거나 여러모로 불편한 사람이었을 나를, 게임에 끼워주고 환영해 줘서 고마워요. 양산의 '공. 수. 대'친구들
-박조건형, 김비 지음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김영사
질문하는 자들은 자신을 질문 거리로 삼고도 자신 아닌 다른 이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끼워주고 환영해주었다는 이유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나와 그대는 아직 저 야만의 입술에 묻은 붉은 피를 닦아내지 못했는데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다. 그래도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다. 엎드려 울고 있는데 살아남아서 같이 싸우자는 인사를 받는다. 어깨를 토닥이는 이들은 여전히 질문하는 자들이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누군가를 위계의 밑바닥으로 끌어내려 유지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최면 걸린 삶을 살아낸다. 잘 버틸 수 있다고 믿는 당신 옆에,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쓸모와 '정상'의 문턱을 넘어 당신의 옆자리에 앉은 성소수자들이 있다. 이들은 '퀴어'로서 지니는 빨강, 주황, 노랑.... 의 색을 버리고 세상이 칠한 색으로 존재를 썼다 지웠다 반복한다.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다. 존재하기 때문이다.
-희정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오월의 봄
질문하는 자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대도 알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성별로 연호되는 그들을 노동하는 사람으로 호명하는 일은 그토록 지난한 일일까. '계속 군인으로 남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왜 그토록 간절한 소망이 되어야 했나. ‘교실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는, ‘나도 한 사람의 시민’이라는 또 다른 질문하는 자의 외침은 왜 절규로 남아야 했나. 자신의 삶을 무대에 올리고 싶었던 또 다른 질문하는 자의 소망은 왜 무대 밖의 삶이 되어야 했나. 그들은 왜 생존을 꿈꿔야 했나. 그들의 당연한 노동에 대한 의지는 왜, 왜 그토록 허황된 꿈이 되어야 했나.
살아있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대교도인가 기독교도인가? 헝가리인인가 미국인인가? 여자인가 남자인가? 너무 많은 상반되는 것들이 함께 존재했다. 하지만 그녀의 누워 있는 몸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 우주에는 단 하나의 구분, 단 하나의 진정한 이분법이 있구나. 삶과 죽음. 다른 모든 것들은 그저 녹아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수전 팔루디 지음 손희정 옮김 <다크룸> 아르테
밤새 불면의 강을 헤엄쳐 온 그대와 나, 살아있다.
싸울 시간이다.
그러면, 우린 누구와 싸워야 할까. 한마디로 말하겠다. 부정의와 싸워야 한다. 부정의라. 너무 무거운가. 둘러보면 사방이 부정의하다. 일찌기 한번도 시민으로 호명된 적 없던, 그리하여 법을 어길 권리조차 없던 여성에게 국가가 죄를 묻는 일은 부정의하다. 일찌기 국민으로서 권리를 부여받지 못한 여성에게 의무만을 부여하는 일은 부정의하다. 낙태죄가 그러하고 여성징병제가 그러하다. 가부장체제로부터 해방되고자 투쟁했던 여성들이 남자들의 방식으로, 삭제하며 배제하고, 착취하며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남자들의 길을 따라 가는 일은 부정의하다. 안전이라는 미명 하에 생물학적 여성만을 살아갈만한 존재로 인정하는 페미니즘은 부정의하다. 성적 대상으로만 존재할 뿐 성적 주체로 호명되지 못하는 여성의 섹슈얼리티, 특히 청소년의 성적 존재에 대한 부정은 부정의하다. 돌봄, 가사, 공장, 농사에 투여되는 백만 이주 노동자를 딛고 서 있는 우리가 난민을 혐오하는 일은 부정의하다. 개, 고양이와 함께 살면서 소와 돼지와 닭을 먹는 삶은 부정의하다. 3차까지 코로나 백신 접종 완료를 한 북반구의 사람들과 코로나 백신을 구할 수 조차 없는 남반구의 사람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인류세는 부정의하다. 그렇다면 정의는 무엇이어야 할까. 내가 선 자리의 부정의를 직시하되 내 주위의 온갖 부정의를 외면하지 않는 일이 정의가 아닐까. 여성의 노동을 담보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기획은, 여성의 노동을 무가치한 것으로 폄하함으로써 존재하는 자본주의가 원하는 것은, 실은 손 잡는 일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파편화되고, 분자화되는 것, 그리하여 불안에 잠식되는 것, 그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 거대 도시의 극장과 공연장이 문을 닫는 시기, 인구 이천 명의 작은 마을에서 1년 동안 여덟 번의 연극 공연 및 낭독회를 가졌다. 매달 서른 명 남짓의 구독자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독료를 선지급하며 작은마을의 작은 창작활동을 지지하고 응원했다. 공연 후 구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늘 공연 시간인 30분을 훌쩍 뛰어 넘었다. 공연을 만드는 일도, 공연을 관람하는 일도 모두 우리가 잘 모르는 세상을 환대하는 일이었다. 손 잡는 일은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일임과 동시에 보이지 않던 존재들을 가시화하는 일임을 절감한 시간이었다. 지역은 거대 도시의 식민지가 아니다. 지역에는 지역의 삶이 존재하며 그 삶은 거대도시의 방식으로 가시화되지 않는다. 더 작은, 더 세밀한, 더 끈끈한 서클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