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기 프로젝트
1월 말, 다시 옷장을 비웠다. 도전할 때마다 실패하고 마는 '책 100권 남기기 프로젝트'는 잠시 미뤄두기로 하고 책장 대신 옷장을 공략했다. 비워내는 김에 욕심을 부렸다. 신발과 가방을 포함해서 서른 세벌의 옷가지만 남겨 석 달을 지내보기로 했다. 이른바 333 프로젝트에 돌입한 것이다.
90센티 폭 옷장 중 아래 칸 하나, 같은 폭의 서랍장 두 칸에 속옷과 양말을 포함해 모두 수납할 수 있을 만큼만 옷을 가지고 살 작정이었다. 작년 9월에 한 차례 비워냈는데도 그 새 또 늘었다. 더구나 도톰하고 두툼한 옷들이 공간을 장악하는 계절, 겨울이다. 33벌의 옷으로 3개월을 버티라는 걸 보니 이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한 이는 아마도 사계절이 명확한 기후에 살고 있었나 보다. 사계절이 명확한 기후라. 나는 그곳에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미 그런 계절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서른 세벌을 제외한 옷가지들은 의류상자에 담아 따로 두었다. 석 달 동안 한 번도 열어보지 않으면 그것은 내게 소용없는 것들이니 나눔 하거나 후원하려 한다. 석 달은 그러니까 정 떼는 기간이다. 프로젝트에 접어든 지 20일 정도 지났다. 그 사이 여벌옷 상자를 언박싱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작은 아이 졸업식 날이 그랬다. 그러나 자물쇠를 채워 둔 상자에도 별 다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서른 세 벌 중 세 벌이 포멀 한 상의인데도 다른 옷을 갈구하는 상황은 그냥 습관인 것이 분명했다. 한의원에서 진료받을 때 즐겨 입는 검은색 와이드 팬츠를 입고 겨자색 외투 안에 초록색 목티를 받쳐 입었다. 와이드 팬츠는 사실 강의할 때 자주 입던 강의템이었다. 그러나 333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마실템과 강의템의 경계는 보기 좋게 무너졌다. 그리고 졸업식은 잘 끝났다.
조변석개하는 날씨 때문에 박스를 만지작 거리기도 했다. 유독 따뜻한 설을 보냈다. 유독 따뜻함이라는 것의 따뜻한 속성은 해가 바뀔 때마다 더 뜨끈해진다. 봄이 오겠거니 하면서도 이렇게 따뜻해선 도무지 농사가 걱정이라며 혀를 내두르던 중이었다. 엊그제 폭설이 내렸고 서른 세벌에 포함되지 않지만 날씨를 감안해서 내놓았던 눈바지와 제설용 장갑을 다시 챙겼다. 어제는 무겁게 느껴졌던 외투가 오늘은 스산해 보이는 날씨 속에 살고 있다. 밭 가장자리에 내놓았던 음식물 쓰레기 주변을 윙윙대며 날아다니던 벌들도 재빨리 몸을 숨겼다. 이웃 중엔 개구리를 본 이도 있다던데 벌은 얼마나 놀랐을 것이며 개구리는 또 얼마나 황당할 것인가.
아직까지는 나에게 333 프로젝트란 고행이라기보다는 발견이다. 파란색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옷장에 남겨둔 대부분의 옷들은 초록이거나 카키이거나 연두다. 물론 모노톤에 대한 애정은 끝이 없어서 피아노 건반처럼 에보니와 아이보리가 주를 이룬다. 포인트를 담당하는 것들이 그린인 셈이다. 고개만 들면 연둣빛 새싹을 마주할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다. 초겨울 무를 뽑아낸 밭에는 이미 마늘 순이 폭설을 이겨내고 올라온 터다. 지난해 정부는 그린 뉴딜을 선언했고 그 초록불이 누구를 향해 켜진 것인지는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어떤 이들에게 위기인 것이 다른 이들에게 평화일 때 그 시간의 이름은 지옥이 아닐까. 서른 세벌의 옷과 보내는 한 철, 나는 혼자만의 평화를 만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