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걸 다 계획하는, 루틴형 인간

-오래 살기 프로젝트

by 정상순

계획 세우는 것을 좋아한다. 계획을 실행하는 것과는 다소 무관하다. 남들에게는 그저 할 일인 것이 나에게는 계획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폼이 나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체조를 한다. 그리고는 털어 낸 이부자리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오늘의 계획을 세운다. 나의 첫 계획은 이것이다. '물 마시기'. 물 마시기 다음은 비타민 먹기이고 그다음은 아이들 아침 준비하기이며 그다음은 빨래 돌리기일 수도 있는데 아침 준비하기와 빨래 돌리기 사이에 사과 한쪽 베어 물기가 끼어들 수도 있다. 앱에 오늘의 계획을 일목요연하게 적고 실행할 때마다 체크한다. 이렇게 하면 아침 9시가 되기도 전에 이미 여섯 개의 계획을 실행한 셈이 된다. 남들에게는 그저 할 일이거나 일상 템인 위의 일들이 내게는 계획이요, 실행으로 호명되는 이유는, 말했다시피 폼이 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이유를 더 들자면 내가 대단히 일 중심인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 때, 그러니까 결혼 직후 임출육의 세계에 머물러 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일 중심의 사람이라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일 중심인 사람들을 폄하했다고 하는 게 맞다. 일에 빠져 관계를 돌볼 줄 모르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다. 그런데 말이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양육은 일이 아니면 뭔가. 양육에 원플러스 원으로 따라붙는 살림이 일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일인가. 게다가 살림은 (말 그대로 '살림'이다) 살려내는 일이다. 이 일에는 시간을 쪼개는 계획이 필요하고 아이들이 어린 경우에는 분단위 초단위 정밀 계획이 수반되어야 한다. 안 그러면?

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임출육의 세계에서 사알짝 비켜나 가정 밖의 일 그러니까 바깥양반들이 하시는 그 '사회적인 일'이라는 것을 하게 되고 나서야 내가 일 중심인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나는 일이라는 것을 죽도록 하고도 그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무임금, 그림자 노동이었기에 노동의 주체인 나조차도 나를 일하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우리 사회에서 인간의 조건은 노동이고 노동하는 자는 남성이므로. 여성의 노동은 부업이고, 남편이 버는데 사서 하는 고생이므로.


50대가 되어 많은 일을 정리한 가장 큰 이유는, 몸이 아파서였다. 두 번째는 삶의 방식을 전환하고 싶어서였다. 정리하고 돌아보니 잘했다 싶은 가장 큰 이유는, 누구도 나처럼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누구도 나처럼 일하기를 바라서는 안된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이제는 나보다 젊고 아이디어 쌈박하고 기술력까지 짱짱한 이들에게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내가 할 일은 박수치고 후원하는 것 뿐이니.


싱어게인에서 유희열은 말했다. 젊었을 때는 선배들한테 음악을 배웠는데 나이가 드니 후배들한테 배운다고. 그가 옳다. 또 싱어게인 얘긴데, 진행을 맡은 이승기는 말했다. 성실함도 끼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가 옳다. 그래서 나는 이승기가 아끼는 게 티가 난 37호가 좋았다. 예술가는 끼 방출 인간형이 아니라 성실하게 노력하는 루틴형 인간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주신 37호 태호님, 부디 흥하십시오. (끼냐, 성실함이냐 이건 다음에 꼭 다시 얘기해보고 싶은 주제니 투비 컨티뉴드)


어쩌면 눈을 뜨자마자 별 걸 다 계획하는 루틴형 인간인 나는 바쁘고 분주했던 과거를, 집 밖의 세계를 여전히 동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리적인 일은 멈췄으나 심리적인 일은 여전히 실행 중인지도 모른다. 그럼 뭐 어떤가. 나는 이제부터 식빵 한쪽을 구워 땅콩잼 바르기 계획을 세울 것이고 그것을 반드시 실행할 것이며 그 덕분에 입이 즐겁고 배는 부를 것이다. 오늘도 벌써 열 한가지 계획을 세우자마자 실행했다. 별 걸 다 계획하는 루틴형 인간의 하루는 이렇게 또 저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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