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 6월 세미나 '감자'의 토론문에 대한 응답
1.
오일장에 들러 호박, 당근, 오이, 버섯을 샀다. 비닐봉지 대신 채소용 에코백을 내밀면 아이고, 이 깨끗한 가방 더럽혀서 어쩌냐 하시면서도 밭작물 파는 어르신들은 꼭 덤을 주신다. 딸아이들이 감자를 사다 달라고, 카레 할 때 넣어 먹겠다고, 조림을 해서 먹겠다고 할 때마다 하지까지 기다려라,라고 엄포를 놓다가 오늘 큰맘 먹고 하우스 햇감자도 들였다.
입구가 망가져 몇 해를 고쳐 쓴 물조리개는 오줌 액비 줄 때 쓰기로 하고 동네 철물점에 들러 또 '큰 맘' 먹고 새 걸 샀다. 오랜만에 들른 철물점엔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눌러써도 금세 나를 알아보는 동갑내기 친구가 있다. "몸이 안 좋아서 술 안 마시지?"라는 친구의 말에 "마실 수 있어."라며 호기도 부려본다.
철물점을 나서 동네 카페에서 비건 옵션 커피를 주문한다. "ㅅㅁ가 먹을 거야."라고 얘기하면 ㅅㅁ의 취향에 따라 달달함을 맞춰주는 동네 카페가 마을에 있다. 취향이 존중된 커피는 장터표 꽈배기를 나눠먹으며 수다를 떨 친구의 몫이다.
2.
고구마 줄기를 볶았다. 작년에 거둬 냉동실에 보관해 둔 걸 꺼내 볶았다. 나는 이제 고구마 줄기를 보면 곽혜숙 씨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콩나물을 보면 10년간 지하 연습실 생활을 함께 하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후 종신보험에 가입한 극단 선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오늘도 나는 고구마 줄기를 볶으며 곽혜숙 씨를 생각한다.
곽혜숙 씨는 ‘나의 해방 일지’에서 나를 가장 압도했던 인물이다. 구 씨도 염미정도 이토록 나를 압도하진 못했다. 그이가 고구마 줄기를 벗길 때마다, 머윗대를 손질할 때마다, 나물을 무치고 시래깃국을 끓여 댈 때마다 특히 얼음 띄운 미숫가루를 싱크대 공장으로 동동거리며 나를 때마다 나는 어쩐지 불안했다. 구 씨가 고구마 줄기 김치를 젓가락 가득 집어 입으로 가져갈 땐, 솔직히 염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고구마 줄기 김치는 그렇게 ‘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고구마 줄기 하나하나를 손에 들고 껍질을 벗겨 내야 구 씨가 감히 입안 한가득 밀어 넣은 고구마 줄기 김치를 맛볼 수 있다. 그래, 저 가족들 중 누가 고구마 줄기 껍질을 벗겨 봤을까. 적어도 구 씨나 염제호 씨는 아닐 것이다.
그이가 떠난 후, 염제 호씨네 밥상은 무너졌고, 밥상에 깔려 압사할 것이 두려웠던 가족들은 또 다른 곽혜숙 씨를 등장시킴으로써 요행히 대참사에서 벗어났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해방 일지>는 누구의 해방 일지일까. 죽어야 사는, 죽어야 해방이 되는, 죽기 직전에도 딸의 상실감을 먼저 생각하는 곽혜숙 씨의 삶을 나는 결코 응원할 수 없다.
3.
셋째 아이를 놓쳤을 때, 나를 일으켜 세워준 건 병원이 아니었다. 해산했을 때와 꼭 같은 몸조리를 해야 하는 나에게 죽을 쒀 나르고 말벗이 되어준 이웃과 친구들이었다. 아프신 아버님과 고군분투하던 시절이나 아버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 나의 마음을 만져주고 싸늘하게 식은 한겨울 구들방을 덥혀준 것은 심리상담사나 아파트 관리실의 난방 시스템이 아니었다. 장지에 미리 둘러서서 이동식 난로를 설치하고 삼일장 치른 이들의 심신을 달래준 것은 장례관리사가 아니었다.
모두가 이웃이었다.
얼마 전, 탈성장 세미나에서 '감히' 기후위기의 환대, 라는 말을 했더랬다. 기후위기와 환대라. 어떻게도 조화로울 수 없을 것 같은 두 단어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무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 같다. 여전히 말라버린 계곡이 걱정되고 물기 없는 바람이 나는 두렵다. 하지만 이런 시간일수록 더 많이 '친애'하고 '추앙'하려 한다.
서울에 계신 아빠는 어쩌면 이번 여름이 고비다. 스스로 생을 마감할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곡기를 줄이고 있는 그의 남은 시간에 나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그가 몰아쉰 숨을 ‘탁’하고 뱉어낼 때 그래서 영원히 눈을 뜨지 않을 때, 적어도 내가 미치도록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것만은 안다. 아빠를 보내느라 꽤 오래 비워야 할 집에 온기를 불어넣어 줄 이들이 있다는 확신. 뭉치의 산책을 부탁할 이웃이 있다는 든든함. 상을 치르다 까무룩 잠이 들어 아빠 얼굴이 떠오를 때 주저 없이 전화 걸어 울음을 참지 않아도 좋을 친구가 있다는 안온함. 과연 나는 미치도록 외롭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나는 또 여전히 이웃의 온기 속에서 아빠가 간 길을 따라 내 몫의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4.
태극권 수련은 날이 갈수록 재미있고 오랜만에 철물점 친구와 술자리를 기약한 오늘. 술 마실 수 있다고 호기를 부리니 "그럼 날 한 번 잡자."며 호기를 환대해 준 친구가 있었던 오늘. 또 다른 동네 친구가 정성스레 키운 모종을 밭에 옮겨 심으며 설거지물과 고사리 삶은 물을 새로 산 물조리개에 담아 가문 땅을 적실 수 있었던 오늘.
살고 싶어 진다. 자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