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제주겨울도보여행8

by 정상순

다른 여행자들의 여행기를 볼 때마다 궁금했어요. 여행을 마친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뭘 할까. 짐을 정리한 후 빨래를 돌리고 있을까. 사진 정리를 할까. 여행기를 쓰고 있을까. 이미 다른 여행을 준비하는 중일까. 혹시 여행자 아닌 여행 노동자로서 완수해야 했던 고된 여정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 비로소 쉼표를 찍고 있진 않을까.


저는 어땠냐 하면, 집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일을 하러 갔어요. 여행지에서 이미 잡힌 일들이었죠. 제주 여행에서 대단한 기운을 얻어와서 그랬던 건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여행과 삶 사이에 생각만큼 그렇게 큰 경계가 있는 건 아니어서요.


별생각 없이 짐을 꾸렸어요. 근데 계획은 참 많이 세웠어요. 너무 이것저것 검색을 해대서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지요. 6박 7일 일정 중 첫 숙소와 마지막 숙소만 정하고 다른 일정은 모두 되는대로 해 본다, 이게 이번 여행의 목표라면 목표였는데, 장렬하게 실패했어요. 검색하다 보니 어느새 하루만 빼고 모든 숙소 예약을 마쳤더라고요. 걷는 코스도 세밀하게는 아니지만 길을 잃지 않을 만큼 정해놨고요. 그냥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이걸 받아들이는 게 이번 여행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도움을 참 많이 받았어요.


6박 7일 동안 저의 태세를 결정해 준 건 바로 9킬로 그램의 짐을 견뎌 준 배낭이었습니다. 그 배낭 짊어지고 다니면서 무겁고 힘들기도 했지만 멋지다는 찬사도 여러 번 들었어요. 일안샘, 고마워요. 덕분에 똥폼이라는 제 닉네임에 어울리는 여행을 했답니다.


혼자 뭐든 다 해보겠다고 큰소리쳤지만 햇수로 4년 만에 육지 바깥으로 나가는 거였어요. 쫄 대로 쫄아 있었죠. 하지만 폼이 안나는 건 너무 싫으니까 다 괜찮은 척했어요. 배낭도보여행에 걸맞게 출발부터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싶어서 어찌어찌 광주 공항까지는 갔는데, 제주 도착해서 숙소에 갈 일이 막막했어요. 근데 그때 먼저 제주에 여행 차 와있던 찌니와 찌니의 친구 오뎅이 마중을 나와줬죠. 제주의 첫인상이 모나고 투박할 뻔했는데 먼저 내밀어 준 손 덕에 제주의 품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앉을 수 있었어요.


낯을 많이 가려요. 그러면서 무대에는 어떻게 서냐, 수업이나 강의는 어떻게 하냐, 그런 질문들 하시는데 그거랑 이거랑은 많이 달라요. :) 쓰는 에너지가 다르달까요. 아무튼 도움을 잘 청하질 못해요. 웬만하면 다 혼자서 하려고 하죠. 그래서 실은 늘 위태로워요. 혼자 하려다 발휘되는 건 자신감이 아니라 가끔, 아니 자주, 자만심이니까요. 남의 호흡과 맞추려고 하기보다는 제 호흡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요. 그래서 안심되는 사람들, 안전한 사람들이 아니면 밥 먹는 것조차 편안하질 않답니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 뜻밖의 식사 초대를 받았어요. 윗세오름 다녀온 날, 픽업을 자청해 주신 분도 계셨고요. 두 분 모두 제가 sns에 올린 사진을 보고 제주에 있음을 직감(!) 한 후 연락을 먼저 해 주신 분들이었어요. 덕분에 정말 정성스럽고 맛있는 채식 음식을 맛봤고, 등산 후 피로한 몸을 편히 부릴 수 있었어요. 어디에나 있는 작은학교 양육자들, 요다와 겨루. 참 많이 고마워요. 제가 두 분의 환대에 응답할 수 있는 기회와 용기를 주어서 그게 참 고마워요.


제주숭배모임 회원, 현정. 지치지 않고 은근과 끈기가 뭔지 보여줘서 고마워. 현정 덕분에 제주랑 새롭게 만났어. 그리고 새롭게 시작할 취미도 생겼어. 우리 만나서 엄청 찐, 왕수다 떨자.


엄마가 쉬었으면 좋겠다고 용돈까지 쥐어주며 제주행을 독려해 준 이랑, 살아서 만나자며 쿨하게 인사해 준 해랑 모두 고마워. 엄마 잘 다녀왔고, 매년 하고 싶은 취미도 생겼고, 무엇보다 너드커넥션의 팬이 되어서 돌아왔어!


제주 바닷길과 오름을 걸으면서 내내 음악을 들었어요. 공항에 픽업 와 준 찌니와 오뎅의 차에선 선우정아 노래를 들었죠. 제 플레이 리스트에는 이소라, 김사월, 허회경, 최유리, 다린이 담겨 있었고요. 하도 해수욕장에서 다린의 ‘바닷가’를 들었고, 어리목으로 내려오는 길엔 최유리의 ‘숲’이 흘러나왔어요. 뭐니 뭐니 해도 제주의 이곳저곳은 너드커넥션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네 명의 멤버가 손을 잡고 있는 것 같은 이미지, 바로 이 밴드의 로고예요. 근데 그게 제눈엔 하얀색 세월호 리본 네 개가 연결되어 있는 걸로 보여요. 그게 그냥 참 좋았어요. 너드커넥션의 노래에 등장하는 '그대'도 이성만을 지칭하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고요. 맞아요. 만고 제 해석이에요. 너드커넥션 노래 중에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곡도 적지 않아요. 멜로디를 들으면 알만한 곡들도 있을 거예요. 근데 전 알려진 노래들 보다 좀 더 무겁고 거친 그들의 음악이 좋아요. 노래를 들을 때마다 '어지러운 세상, 따뜻한 음악 너드 커넥션입니다.'라는 밴드 소갯말을 떠올리죠. 그러면 조금 더 살고 싶어 져요. 저, 너드커넥션의 콘서트에도 가 볼 생각이랍니다! 무엇보다 너드커넥션의 노래를 들으면 제주가, 제주에서 걸었던 길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게 참 좋아요. 지금도 너드커넥션의 'Water fall'을 듣고 있어요.


제주의 마지막 숙소에서 공항까지는 정말 가까운 거리였거든요. 아침 이른 시각 비행기라 일부러 이동 거리가 짧은 숙소를 선택한 건데, 거기서 공항까지 가는 길을 또 헤맸어요. 비가 많이 내렸고, 여행자는 길을 잃었죠. 아마도 50미터 반경도 되지 않는 길이었을 거예요. 그 길을 삼십여분 헤맨 것 같아요. 근데 길을 헤매니 좋은 것도 있었어요.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더라고요. 길을 찾아야 하니까요. 이번 제주 여행에서 여러 번 길을 잃었는데 매번 그랬어요. 근데 그게 또 참 좋았어요. 저는 집으로 돌아왔고, 오자마자 일을 시작했고, 생각만큼 보대끼지 않았고, 여행과 삶의 경계를 제법 부드럽게 넘나들었어요. 제가 살고 있는 남원 산내로 돌아왔을 때, 지리산 북부능선은 안개에 싸여있었죠. 그게 또 그렇게 예뻤어요. 그때 알았어요. 돌아올 곳이 있는 여행자의 행운을요.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집이 제일 좋더라. 뭐 이런 얘기는 아니고요. 그저 다음 계절을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는 저를 봤어요. 텃밭에 심은 마늘 싹이 기다려졌어요. 올해는 토마토 순을 좀 더 부지런히 따 줘야겠다는 생각도 했지요. 뽀얀 들깨국물을 더 자주 먹으려면 들깨 농사도 다시 지어야 하나 혼잣말을 하기도 했어요.


이제 저는 다른 여행자의 여행기 끝을 궁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제 여행기의 끝은 하루하루 적어나갈 삶의 일기로 다시 이어질 테니까요. 제주겨울도보여행기를 함께 해주신 구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2023년을 가뿐히, 따뜻하게 시작할 수 있었어요. 덕분이에요.


또 만나요.

따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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