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드 썬, 해랑이에게

-제주겨울도보여행7/20230111

by 정상순

새벽 6시 28분,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귀도리 모자를 눌러쓴 다음 숙소를 나섰어. 일출을 보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안 해 본 일을 '그냥' 해 보는 중이야. 아침해를 온몸으로 맞이하며 길을 나설 땐 눈앞에 펼쳐진 오름과 바다를 나침반 삼아 그저 걷는 것으로 충분했는데, 해뜨기 전엔 이정표를 잃은 여행자처럼 살짝 긴장이 되네. 고요했던 사위가 도로를 달리는 차량으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어. 성산일출봉에 가까워진 모양이야.


엄마는 지금 이 순간, 해뜨기 직전, 모든 것이 숨죽이며 빛과 열기를 환대하는 이 순간을 사랑해. 무대에 설 단 한 명의 배우를 위해 스포트라이트를 양보한 무대 뒤의 수많은 스태프들의 움직임이 이와 같겠지. 모두가 잠든 밤, 새벽길을 여는 보이지 않는 이들의 움직임이 이와 같을 거야. 참! 해랑이도 새벽 논 피사리 해 본 적 있지! 그때 몸은 피곤하지만 뭔가, 좀, 이상하게 좋았던 기억, 그거. 그거랑 같겠지.


해뜨기 전, 성산일출봉 가는 길


성산일출봉은 7시부터 문을 열어. 입장권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고.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땐 7시 전이었고 매표소 문은 굳게 닫혀 있었어. 해돋이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입장권이나 입장 시간에 상관없이 드나드는 모양이야. 매표원들이 출근하기 전이니 도리가 없겠지. 출입구를 폐쇄해 놓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어. 등산로와 탐방로 두 갈래 길이 있는데 일출을 보려면 등산로를 통해 일출봉 정상까지 오르면 돼. 계단으로 쭉 이어진 길이라 호흡을 잘 골라야 한다. 서울에 가면 지하철 역에서 에스컬레이터 대신 늘 계단을 선택하는 해랑이니까 혹시 일출봉에 오게 되더라도 문제없을 거야. 하지만 해뜨기 전 그저 일출 보기를 목표로 주위를 살필 겨를 없이 정상을 향해 오르기만 하는 새벽 산행은 별로네. 힘들 때마다 층계참에서 쉬어갈 수도 있고, 벤치가 마련된 휴게소도 있어. 엄만 계단이 날 지치게 하기 전에 잔걸음으로 쉬지 않고 정상까지 오르기로 했어. 몰려드는 인파 때문에 내 호흡을 챙기기 어려운 길이야. 그러니 짧은 보폭과 자주 뱉어내는 숨이 정상까지 가는 길을 도와줄 거야.


하지만 내가 왜 일출 보러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지 일출봉에 올라오자마자 알아버렸어. 사진 찍겠다고 출입금지 구역에 마구 넘어 들어가는 사람들, 일찌감치 올라와 자리 잡은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자기만 해돋이 보겠다고 그들을 가려서는 사람들… 규칙을 지키는 게 중요한 나는 이런 장면을 보는 게 너무 힘들어. 그렇지만 새롭게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러 와서 미워하는 마음을 키우고 싶지 않아 이내 시선을 돌렸어. 정상까지 올라오는 나무 계단은 젖어 있었고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단다.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 중엔 오늘 해돋이를 보는 건 틀린 거 아니냐며 걱정스러워하는 이도 있었지.

먹구름을 뚫고 나오는 해, 성산일출봉

하지만 오늘의 해는 마침내 먹구름을 뚫고 나왔고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됐어. 위드 썬, 해와 함께, 해랑아. 엄마가 널 낳았던 그 새벽에도 이런 태양이 떠올랐을 거야. 해가 완전히 구름밖으로 얼굴을 내밀자 정상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서둘러 내려가기 시작했어. 붐비기 전에 하산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이었지. 덕분에 나는 성산일출봉 꼭대기에서 오래도록 떠오른 해와 햇살을 받아 한결 너그러워진 나무와 풀과 바위를 구경할 수 있었어. 햇살을 받아 안은 물질들은 참 관대해지더구나. 해뜨기 전의 어두움을 사랑했던 나는 햇살로 인해 만물이 생기를 얻게 되는 이 순간을 더 사랑하게 될 것 같아.



성산일출봉에서 내려와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 광치기 해변에 들렀어. 4.3 사건의 유적지인 터진목에서 바라본 풍광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이했지. 참 다행스러웠던 건 하늘도 바다도 햇살 속에 부서지며 더 너그러워지고 있었다는 거야. 해랑이가 지닌 따뜻함, 주위를 살피는 사려 깊음, 그건 아마도 해뜨기 전의 고요와 해 뜨는 순간의 열기를 감당해 낸 이 시간을 닮아 있는 건 아닐까.


터진목에서 숙소로 돌아와 다시 떠날 채비를 했어. 어제 얇은 패딩을 입고 걸었는데도 제법 땀을 흘려서 오늘은 패딩 조끼하나만 걸치고 떠나려고 해. 성산일출봉을 뒤로하고 오조리 해변을 따라 걸을 때 구름이 낮게 깔리기 시작했어. 엄만 지금 오조리 해변을 향해 가는 길이야. 일출봉에서 201번 버스를 타고 오조리까지는 잘 왔는데 거기서 잠시 헤맸어.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갈 뻔했는데 다행히 2차선 도로 한복판에서 깨달았지.


'아, 거꾸로 왔구나.'


하지만 돌아가면 되니, 거기에 또 길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그래서 패기 있게 뒤로 돌아 다시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어. 목적지가 어디냐고? 오조리에 있는 식당이야. 들깨쑥떡국 먹으러 가는 길! 해물과 흑돼지 일색인 제주에 들깨쑥떡국을 파는 곳이 있다고 해서 일부러 찾아왔어. 배낭을 내려놓고 신발 끈도 느슨하게 푼 다음, 성스러운 마음으로 들깨쑥떡국을 기다리는 중이야. 짜잔~ 들깨를 손수 갈아냈음이 틀림없는 뽀얀 국물에 쫄깃쫄깃한 쑥떡국이 잠겨 있구먼! 반찬은 또 얼마나 정갈하고 맛나는지. 플레이팅도 해랑이 마음에 쏙 들 걸! 싹싹이 주걱이 있다면 더 말끔히 비워내고, 발우공양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어.

오조리 해안 식당의 들깨쑥떡국!

근데 식당 밖 하늘이 심상치가 않네. 아무래도 바람막이를 꺼내 입어야 할까 봐. 뜨끈한 국물로 속을 채웠으니 또 열심히 걸어 봐야지. 와우! 비를 맞으며 바닷길을 걷는 기분은 이런 거로군. 바람막이를 튕겨 나가는 빗방울이 점점 탄력을 받고 있어. 오조 항 입구에서 레인커버를 꺼내 배낭에 씌웠어. 아우! 지금껏 다정함만을 보여줬던 바람, 바다, 비. 이들은 실은 무지하게 강력한 존재였구나! 아무래도 잠시 비를 그어야겠어. 길 건너편에 카페가 보인다. 제주까지 와서 들어갈 일이 있을까 싶었던 투썸플레이스, 바로 그곳에서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려야 할까 봐.

비가 오지만 다시 걷겠어


커피 한 잔을 다 마셨는데도 아직 비가 많이 와. 아무래도 오늘 오후 일정은 접어야 할 것 같아. 제주에 있는 동안 내내 나를 날씨요정이라고 불러줬던 친구에게 비를 피해 카페로 들어왔다고 전했더니 이런 문자를 보내왔어.


"날씨요정은 마지막날까지도 카페에서 멍 때리라고 최적의 날씨!


정말 그러네. 그냥 이번 여행에선 계속 '요정' 역할을 해야겠어. ㅋ


오늘 숙소는 제주공항 근처로 정했어. 종달리 정류장으로 가서 제주버스터미널 행 버스를 타야 해. 거기서 한 번 더 버스를 갈아타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어. 이 카페는 종달리에 있는 투썸이니까 종달리 정류장은 아주 가까이 있겠지. 하지만 비가 오니 날이 맑을 때만큼 마음이 낙관적 이질 못해. 어쩐지 서두르게 되고 쫓기는 기분이 들어. 예상대로 버스 정류장을 찾느라 많이 헤맸어. 비를 맞은 몸으로 택시를 잡아 타는 것도 마음이 불편해서 그대로 걸었어. 실은 더 많이 헤맬 뻔했는데 둘째 날 하릴없이 종달리 이곳저곳을 걸은 덕분에 그때 눈에 들였던 이런저런 스폿이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됐어. 제주터미널까지 오는 동안 졸다 깨다를 반복했고, 터미널에서 공항 방향 버스를 타느라 또 많이 헤맸어.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서 들어간 카페의 아메리카노는 맹탕이었고, 천연효모발효빵에선 신맛이 났어. 숙소 입구에 도착하고 보니 버스를 한 정류장 먼저 내렸으면 코 앞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지. 엉망진창이었지만 숙소가 너무 깨끗해서 정신이 번쩍 들었어.


숙소에 도착해서 따뜻하게 씻고 난 후, 엄만 또 다른 여정을 계획하고 있단다.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ㅋ) 제주 여행의 마지막 날인 오늘, 다시 제주에 올 채비를 하고 있어. 해랑아. 문득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 때, 도리어 길을 나서 봐. 엄마가 걷고 있는 지금 이 길도 그런 길 중의 하나거든. 모든 게 지겹고 미워질 것만 같아서 걷기 시작했고, 그 모든 걸 그리워하거나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더 걸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그리고 네가, 언니가 언젠가 걸었음 싶은 길을 만나게 됐지. 그것으로 됐어. 나중에 엄마가 걸었던 이 길을 걷게 되면 그때, 들깨쑥떡국 맛이 어땠는지 들려줘. 제주의 바람과 바다에 대해 얘기해 줘. 그리고 해랑이가 떠올린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도 들려주렴.


엄마에게 사랑이 뭔지 알려 준 존재,

위드 썬, 해랑.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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