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겨울도보여행 6/20230111
이랑아, 엄만 어제 오랜만에 푹 잤어. 이틀 동안 묵고 있는 숙소에 바가 있거든. 그곳에서 마신 와인 덕분이었을까. 빡센 일정 때문이었을까. 아, 맞다. 이 숙소, 이랑이도 와봤던 곳이야. 올레스테이라고 4,5년 전쯤 아빠랑 해랑이랑 함께 왔던 곳.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엄청 맛있었던 곳이라면 기억할까. 그게 벌써 4,5년 전이라니 정말... (다음 문장은 안 쓸래. ㅋ)
어제도 걸을 만큼 걸었어. 따뜻한 물로 씻고 나서 바가 있는 1층으로 내려갔지. 난 열심히 걷고 난 후엔,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편하게 입는 걸 좋아해. 그래서 스텝이 엉켜 한 발짝도 더 걸을 수 없을 것 같은 와이드 팬츠를 입고, 할아버지 슬리퍼를 신은 다음 슬렁슬렁 1층으로 내려와 우아하게 하우스 와인을 주문했단다. 올레스테이에선 제주 수제 맥주도 마실 수 있어. 하지만 모두 에일 맥주여서 주문하지 않았어. 난 에일 맥주보다는 라거가 좋거든. 두 가지 맥주가 어떻게 다르냐고? 글쎄 엄마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내가 알고 있는 두 맥주의 차이는, 라거가 더 저온에서 발효된다는 것, 에일 맥주에선 과일향이나 신맛이 느껴지는데 비해 라거는 청량감이 강하다는 것 정도야. 엄마가 아끼는 하이네켄 병 알지? 골디가 네덜란드 하이네켄 공장에서 나의 수많은 닉네임 중 하나인 '테리'를 새겨 선물해 준 그 병. 맞아. 난 하이네켄, 특히 병에 든 하이네켄을 좋아해! 이랑이는 어떤 맥주를 즐겨 마시게 될까.
음, 맥주 얘기를 하다 보니 옆으로 심하게 샜군. 암튼 하우스 와인을 마실 때 할아버지 슬리퍼를 신고 있었는데 그게 그냥 좋았어. 실은 이 슬리퍼, 꽤 무거워서 가져올까 말까 고민했거든. 하루 종일 걷다 보면 숙소에선 잠만 잘게 뻔한데 이걸 신을 일이 있을까 싶기도 했고. 첫날 산내에서 공항으로 이동할 때, 그러니까 짐에 가장 적응이 안 됐을 때, 그땐 슬리퍼를, 걷는 동안 짐을 버려야 한다면 제 일 순위로 버려야 할 물건으로 여기기도 했어. 근데 조금 견딘 보람이 있네. 이 바와 이 레드 와인과 이 와이드 팬츠와 할아버지의 슬리퍼가 아주 잘 어울리는 기분이야.
잘 자고 일어났으니 또 걸어야지? 오늘은 엊그제 찌니와 함께 걸었던 길을 혼자서 거꾸로 가보려 해. 찌니랑은 도심으로 편한 길을 따라 걸었거든. 오늘은 해안을 따라 걸으려고. 며칠 전 같은 길을 걸을 땐 사람을 피하다시피 무작정 걷기만 한 것 같아 아쉽기도 해서. 이랑이, 산티아고 길 걸을 때 선두로 치고 나가서 엄청 빨리 걸었다고 했잖아. 그 심정 엄마도 좀 알 것 같아. 외롭기는 하지만 섞이고 싶진 않은 느낌이랄까. 수많은 인파 속에서 잠깐 그런 마음이었어. 이랑이는 어땠을까. 무엇이 이랑이를 치고 나가게 했을까. 무엇이 그토록 한달음에 그 길을 걷게 했을까.
올레스테이에서 출발하면 서복전시관까지는 시내 중심가를 통과해야 해. 엄만 이른 아침 도시의 공기도 좋아. 화려한 출발 이전의 숨 고르기, 엄청난 소음 직전의 고요, 굳게 닫힌 술집의 셔터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식당의 생기가 공존하는 시간. 이중섭 거리를 지나 정방폭포 입구에 이르면 이젠 해안을 따라 그저 걷기만 하면 돼. 배낭엔 어제 채현이 엄마로부터 받은 유기농귤이 가득하고 윗세오름에서 다 먹지 못한 에너지바가 남아 있으니 두려울 게 없단다. 한데 서복전시관을 지나 잠시 멈춰 서지 않을 수 없었어. 내가 태어나기 2개월 전, 제주 바다에서 이런 참사가 있었다니. 여전히 난 모르는 게 너무 많구나. '남영호해안조난사고' 바닷길, 가없는 절망과 고통 속에 헤맸을 그분들의 마지막을 떠올리니 2014년 이후, 여전히 이 일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토록 눈부신 해를 마주하며 아침을 먹는 호사를 누리는 나의 지금이 기이하기도 하고.
이랑이도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아침 일찍 나섰다고 했지? 한낮의 더위를 피해 걸으려고 말이야. 엄마도 오늘 서둘러 길 위에 섰어. 겨울이지만 제주는 따뜻해서 아침을 일찍 열기에 좋아. 조금 서두르면 더 고즈넉하고 더 호젓한 길을 만날 수 있기도 하니까. 오늘이 제주에서 맞이하는 네 번째 아침이야. 제주 동부를 걷고 있으니 매일 아침해를 아주 가까이에서 마주 하게 돼. 네 번 제주의 태양을 마주했고 태양은 매번 달랐어. 수미이모한테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찍어 보냈단다. 사진을 본 이모가 이렇게 답장을 보내왔고.
"매일이 새해 첫날이네.
매일 사랑해."
이 날 걸었던 길 위에서 찍은 사진은 죄다 바다와 해 그리고 바다와 해가 서로를 매만지며 빚어내는 윤슬뿐이야. 아마도 오늘이 '틈날 때마다 주저앉고, 숨 쉬듯 멈춰 서고, 누구보다 천천히 걷기'를 목표로 했던 이번 제주 여행의 취지를 가장 잘 살린 날인 것 같아. 동쪽에서 떠오른 해를 마주 보며 바닷길을 따라 걷는 이 여정은 실은 올레길 6코스를 역방향으로 걷는 여정이야. 엊그제는 쇠소깍에서 올레스테이까지 걸었고 오늘은 올레스테이에서 쇠소깍 쪽으로 걷는 중이란다. 원래 계획은 쇠소깍에 다다르기 전에 중간쯤에서 버스를 타고 김영갑 갤러리로 이동할 생각이었어. 하지만 윤슬에 취해 바닷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쇠소깍에 도착했구나. 아, 김영갑 갤러리. 이랑이는 기억 못 하겠지만 거기도 이랑이 가 본 적 있단다. 세 살이 안 됐을 때, 제주 출장 온 아빠를 따라 들렀었지. 그때 엄마 뱃속에서 해랑이가 놀고 있었다는 건 좀 더 나중에 알았고.
길을 걸으며 생각했어. 문득 길을 잃었다는 기분이 들 때, 이랑이가 이 길을 걸으면 좋겠다고. 밀어내듯 땅을 딛는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면 좋겠다고. 대결하는 마음을 밀어내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간직하면 좋겠다고. 무턱대고 배낭을 부리고 주저앉아도 좋겠다고. 그저 바람과 바다 내음을 느끼며 파도에 부서지는 햇살을 멍하니 바라보면 좋겠다고.
쇠소깍을 지나 다음 목적지인 성산으로 가기 위해선 버스를 타야 했어. 버스 정류장까지 꽤 먼 거리를 걸어가야 했고 길을 찾지 못해 헤매기도 했단다. 하지만 정류장은 거기 있었고 버스는 제법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더구나. 서두르지 않으면 뭐든 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어. 201번 버스는 동남일주도로를 달리는, 뚜벅이 여행자들에겐 정말 소중한 버스야. 쇠소깍에서 성산까지는 한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데 바다 쪽 좌석에 자리를 잡고 바다 구경을 하다가, 또 졸다가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제주에 오면 꼭 타 봐. 성산까지 가는 이 길이 또 그렇게 좋단다.
숙소 체크인을 하고 빨래방에 들렀어. 대형 세탁기 속에서 뱅글뱅글 돌아가는 빨래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꽤 멀리 떠나 왔다는 생각이 든다. 광치기 해변이 보고 싶어 건조기는 사용하지 않고 서둘러 나왔는데 벌써 해가 지는구나. 일단 떡볶이와 맥주를 사들고 다시 숙소로 가야겠어. 제주에 와서 떡볶이만 세 번째! 빨래방 가는 길에 있던 반노점상 떡볶이가 눈에 들어와서 돌아가는 길에 데려가려고 해. 내일은 아침 일찍 성산일출봉에 들렀다가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 볼 생각이야. 일출 보는 거 별로 취미 없는데 성산일출봉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여행자가 되어 보려고.
이랑아, 맞아. 이랑과 고랑 거기서 출발해. 이랑이의 이름. 엄마는 처음 귀농했을 때 밭이랑과 고랑을 보면서 어쩜 이것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결이 아닐까 생각했어. 올해 이랑이었던 땅은 내년엔 사람의 발에 밟히는 고랑이 되고 고랑은 다시 작물을 키워 낼 이랑이 되지. 그 높고 낮음 없음, 너와 나 사이의 경계 없음, 그 넉넉함과 여유로움이 결국 총체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구나 싶어. 이랑아, 엄마는 이랑이한테 해줄 이야기가 많아. 하지만 서둘러 이야기하는 엄마가 되기보다는 이랑이의 얘기를 가만히 들을 수 있는 엄마가 되어보려고 해. 나중에 혹시 이 길을 걷게 되거든 그때 들려주렴. 제주 남부 바다의 윤슬에 대해. 이랑이가 본 제주의 낮과 밤에 대해. 이 길을 걸으며 떠올렸던 소중한 것들에 대해.
엄마에게 삶의 환희를 알려 준 존재.
땅 물결, 이랑.
사랑해.
이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