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겨울도보여행5/20230110
현정, 나는 어제도 잠을 설쳤어. 방음이 허술한 숙소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마치 십여 년 전, 국선도 수련을 시작했을 때처럼 제주에 온 다음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깨곤 해. 십 년 전 그땐, 5시 반에 시작하는 수련 시간에 늦을까 봐 그랬다면, 지금은 왜일까. 뭐가 여전히 나를 채근하는 걸까.
새벽 6시 반, 영실매표소로 가는 택시 안이야. 영실매표소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곳이네. 이 시간, 이토록 구불거리는, 이토록 캄캄한 길을 나 혼자 오르지 않도록 동행해 주시는 택시 기사님께 그저 감사할 뿐이야. 아직 해뜨기 전 이른 시각, 길 상태가 어떨지 몰라 매표소에서 택시를 내렸어. 영실매표소에서 다시 40분 정도 걸어야 탐방로 입구에 도착한다고 해. 배낭을 추스르고 탐방로 뱡향의 차도를 따라 걷자니 짙은색 승합차 한대가 천천히 내 옆에 멈춰 서네.
"삼촌, 일부러 걸어 가시는 거예요?"
"아.... 저, 제가 삼촌은 아닌데... 걸어가는 건 맞아요.'
운전대를 잡은 분은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 분이었고 그가 나를 삼촌이라 불렀지. 그 옆엔 대여섯 살이 더 어려 보이는 여성분이 동석하셨는데 내 대답에 입을 가리며 많이 웃으셨어. 차창이 올라가고 승합차가 내게 꽁지를 보이며 앞서가는 순간, 깨달았지.
'아, 삼촌. 그 삼촌...'
성별에 상관없이, 친척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자신 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을 부르는 호칭. 제주의 삼촌. 나는 그저 늘 그랬듯, '이 제주, 이 밤, 이 산 길에서도 나의 성별은 교란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거든. 실은 며칠 전 지미봉에서 내려오는 길에서도 나를 스쳐가는 남녀가 내가 교란시킨 성별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장면을 목격했더랬어.
"저 사람 남자 게 여자 게?"
"남자 아니야?"
"여자야."
"진짜?"
하지만 새벽부터 성별 프레임에 날 가둔 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던 것 같아. 사실을 왜곡하고 호의에 뒷걸음치고 무엇보다 유머감각을 적재적소에서 발휘하지 못했어! 분발할 지어다!
탐방로 입구에 도착하니 주차장은 이미 만차고, 여기저기에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하는 사람들 무리가 보여. 나는 간이 방석을 꺼내 일부러 털썩 주저앉았어. 아이젠을 낄 때도 스틱을 쭉 잡아 뺄 때도 손아귀에 힘을 줬지. 정말 오랜만의 겨울 산행이라 사실 조금 긴장 돼. 이럴 때 필요한 건, 가볍고 짧은 호흡, 후!
영실탐방로는 초입부터 꽤 오르막이더라. 이런 길에서는 보폭을 좁게 하고 그만큼 호흡을 짧게 하면서 한달음에 올라가는 편이야. 오르막에서 자주 쉬면 처져서 더 힘들어. 하지만 여럿이 함께라면 그때는 다른 보폭과 다른 호흡이 필요하겠지.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계단인지 흙길인지 알 수 없는, 그저 눈으로 뒤덮인 오르막을 걷다 보면 너른 능선을 마주하게 돼. 맞아. 현정도 익히 알고 있는 바로 그 능선.
'사진이랑 똑같구나'
윗세오름으로 향하는 능선에 접어들었을 때 내가 떠올린 첫 문장은 이거였어. 하늘과 눈 쌓인 산자락과 구름이 경계 없이 넘나드는 곳, 산자락 끝나는 자리에 같은 높이로 구름이 이어지고 구름 끝자락에 먼바다가 잇대어 넘실대는 곳. 현정, 그 순간, 나는, 오십 대 중반으로 향하고 있는 나는, 계획이나 새로운 소망 같은 건 부질없는 짓으로 치부해 버린 나는 또 하나의 원을 세워버렸어. 살아있는 동안, 매년 겨울, 이곳에, 오겠다고 다짐했어!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했을 때, 살짝 바람이 매서웠지만 염려할 정도는 아니었어. 나에겐 택시에 오르기 전 편의점에서 구입한 에너지바와 어제 찌니로부터 건네받은 된장차 그리고 올레 시장에서 구입한 귤이 있었지. 스패츠와 아이젠 그리고 등산화까지 모두 벗어버리고 양말을 갈아 신었어. 최근 알게 된 꿀팁! 장시간 도보 여행이나 산행 중간에 양말을 갈아 신으면 물집이 생기는 걸 예방할 수 있대! 폼 나는 게 중요한 나는 전문산악인 포스로 양말 체인지를 하고 우아하게 된장차를 마셨단다!
마지막으로 화장실에 한 번 더 들리고 하산할 채비를 했어. 실은 대피소에 도착해서 제일 놀라웠던 게 화장실이었어. (화장실이 너무 따뜻한 거야!) 내려갈 때는 어리목으로 방향을 잡으려 해. 숙소에서 더 멀어지는 여정이라 살짝 고민이 됐는데 감사하게도 지인이 어리목 대피소까지 데리러 와주시기로 했어. 혼자 떠난 여행이지만 이미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 속에서 나는 환대를 거절하지 않는 연습 중이야. 아직은 조금 어색한 사이지만 점심 식사를 함께 하자는 다른 지인의 제안 또한 환대하기로 했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저 오는 일을 막지 않으려고 해.
현정, 이번 제주 여행의 시작엔 현정이 있었어. 삼 년 여 전부터 포기하지 않고 나를 꼬셔준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있어. 그리고 현정이 좋아했고 여전히 좋아하는 이곳에 따로 또 같이 있는 이 기분이 아주 마음에 들어. 마구 셔터를 눌러 댄 사진을 거름망 없이 부끄러움 없이 사진작가 현정에게 마구 전송하고 있는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들어. 사진을 보낼 때마다 "현정이 본 그곳을 나도 보고 있어!"라고 소리치고 있는 거 알고 있지? 이번 제주행으로 현정과 주고받을 얘깃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게 정말 마음에 들어. 아직은 모르겠어. 제주에 와서 새벽잠을 깨는 이유를. 무엇이 나를 계속 채근하고 있는가를.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나를 채근하지 않기로 했어. 우리는 그저 제주숭배모임을 갖도록 해. 숭배할 것이 있는 우리는 행복할 것이 분명하니까.
<제주숭배모임>
회원 : 1.현정 2. 나 (달랑 둘)
비고 : 추가 회원은 받지 않습니다.
현정.
사랑해.
곧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