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겨울도보여행4/20230109
조용했던 숙소가 소란스럽다. 공용부엌과 카페를 이용하는 사람들,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사람들 기척이 느껴진다. 생맥주와 함께 먹은 떡볶이가 꽤 든든했는지 뭘 더 먹을 마음이 나질 않는다. 늘 그렇다. 많이 걸은 날, 적게 먹는다. 그래도 (종달종달) 종달리의 밤을 숙소 침대에 걸터앉아 보낼 수는 없어 동네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제주여행을 준비하며 알게 된 다양한 핫플이 종달리에 모여 있었다. 너무 소란스럽거나 수선스럽지 않은 식당과 책방이 골목길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가로등에 인색하기는 내가 사는 마을이나 종달리나 매한가지다. 그러나 우리 마을과 달리 종달리에는 빈 집이 많다. 그리고 빈 집들은 겨울밤 이방인에게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종달초등학교를 바라보며 걷다가 다시 숙소가 있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빈 집을 곁에 두고 걷자니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비어 있는 집은 지금 막 불을 끈 집과는 다르다. 온기가 없다. 이 집들은 왜 비워진 걸까.
간밤에 잠을 설쳤다. 오늘은 어제처럼 점심 무렵 마무리될 여정이 아니다. 꽤 걸을 작정이다. 좀 더 정성스레 스트레칭을 한다. 숙소 정수기에는 온수 장치가 없다. 무선주전자를 이용해야 한다.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에 나도 몰래 입술을 깨문다. 아직 잠들어 있는 다른 여행자들의 잠을 깨지 말아야 할 텐데. 싱크대 선반에 놓인 소주잔 하나를 가만히 꺼낸다. 그래, 오늘은 찻잔 대신 소주잔이다. 소주잔에 혀가 데일 정도로 뜨끈한 보이차를 따라 마신다.
오늘은 어제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나선다. 숙소를 떠날 때만 해도 제주 동부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무조건 바다 쪽으로 길을 잡는다. 붉은빛을 피해 다른 쪽으로 갈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아침 7시 38분, 수평선 위로 해가 떠오른다. 나는 해를 온몸으로 맞으며 걷고 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여행자에겐 너무나 호사스러운 아침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해는 조금씩 솟아올라 더 넓고 깊게 앞길을 비춘다. 해와 바다가 만나 서로를 도닥이며 빚어내는 윤슬, 도리가 없다. 멈춰 설 밖에. 그리운 이들의 이름을 부른다. 산 것과 죽은 것의 경계가 모호할 때, 태양은 빛과 물질 사이의 경계를 북돋우며 떠오른다. 그래, 살아있다는 건 여전히 좋은 일이다. 해와 바다와 윤슬에 취해 걷다 보니 올레길 1코스의 명물 목화휴게소에 당도했다. 꼭 들르고 싶었던 목화휴게소. 사장님은 이미 물일을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나에게 “일찍 나섰네요. “ 하는 다정함까지. 아침 해를 온몸으로 맞으며 종달리와 오조리 해안도로를 거쳐 목화 휴게소에 이른 나에게 오늘은 튀김우동을 허하노라.
시작이 너무 좋았다. 불안하진 않았지만 환희가 끝나고서야 알았다. 내가 어쩌면 불안해했다는 걸. 오조리를 지나 성산일출봉에 이르는 올레길 1코스는 도심을 통과하는 길이다. 그 길 어디쯤에선가 메시지를 받았고 여행을 떠나기 전 마무리하고 싶었던 일이 꼬여가고 있음을 확인했다. 욕지기가 올라왔다.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나는 여전히 일을 못하는 사람이 싫고, 게으른 사람이 싫고, 무엇보다 성의 없는 사람이 싫다. 그 모든 게 체력과 상황과 환경이 허락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는데도 이 생각을 버리긴 어렵다. 모두가 없는 시간을 쪼개어 집중하고 있을 때 '못했다', '안 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의 간단함이 싫다. 이쯤 되면 그냥 억울한 거다. 혼자 삽질하는 느낌, 뻘짓하는 기분.
광치기해변에 9시 반까지 도착해야 쇠소깍에서 11시에 만나기로 한 찌니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도심 올레길을 걸으면서 네 명과 카톡으로 소통하고, 한 사람과는 다소 긴 전화 통화를 하기는 쉽지 않다. 결국 성산항을 마주하고 벤치에 주저앉는다. 넋두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 대상과 정신을 똑바로 차려 상황을 파악해야 할 대상이 있다. 이 길 위에서 조차 이런 분별심을 발휘해야 하는 내 처지가 억울하다. 두고두고 억울하다. 억울한 마음이 지금 내 등에 짊어지고 있는 9킬로그램짜리 배낭보다도 더 묵직하다. 시간은 지체됐고 갈 길은 멀다. 서둘러야 해서 또 억울하다. 성산항을 뒤로하고 언덕을 오르면 멈춰 서서 깊게 숨을 내쉬어야 할 풍광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바다와 하늘과 햇살 아래에서 조차 내쳐 가던 길을 가려고만 할 만큼 나는 어리석다. 그게 또 억울하다.
성산일출봉 입구에 도착했을 때, 찌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친구와 함께 데리러 오겠다며 기다리라고 한다. 그 후에 나는 찌니 친구의 차에서 조금 울었고, 찌니가 건네준 오트라테를 홀짝이며 억울함을 삭였으며, 그들이 데려다준 유채꽃밭에서 마침내 웃었다. 올레길 6코스의 출발점인 쇠소깍에서 세 번째 숙소인 올레스테이까지 찌니의 팔짱을 꼈다가, 어깨에 기댔다가, 손을 부여잡기도 하면서 두 발을 꾹꾹 땅에 내디뎠다. 올레 시장에서 다시 만난 찌니의 친구 (그의 닉넴은 오뎅이다) 는 비건 라자냐를 먹을 수 있는 식당을 검색해 주었다. 정말 맛있었고 무엇보다 테이크아웃 전문점인 줄 모르고 방문한 우리를 위해 간이 의자와 테이블을 세팅해 준 직원분들 덕분에 마음이 몽글거렸다. 주저앉을 뻔했지만 일어섰고, 미움과 억울함에 하루를 잡아 먹힐 뻔했지만 평화를 찾았다. 모두 나 아닌 다른 존재들 덕분이었다. 혼자로 충분하리라 생각했던 길에서 손을 내밀어 준 벗들 덕분이었다. 빛과 물질 사이의 경계를 북돋우며 떠오른 아침의 태양을 기억한다. 나는 여전히 경계를 분명히 하는 일에 관심이 있을 뿐 북돋는 일은 서툴다.
그게 또
억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