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겨울도보여행3/20230108
첫 숙소를 이곳에 잡길 잘했다. 오름을 인기 순위대로 오르는 것도, 올레길을 1코스부터 차례로 걷는 것도 이번 여정의 목표는 아니었다. 그저 해안도로를 따라 걸을 수 있으면 충분했다. 올레길 가까운 곳 어디든 괜찮다는 마음으로 잡은 숙소가 바로 제주해녀박물관 건너편. 해녀박물관은 올레길 21코스의 시작점이다. 오전 8시 반, 배낭 제일 위, 손 닿기 좋은 곳에 접이식 방석을 챙겨 넣는다. 틈날 때마다 주저앉고, 숨 쉬듯 멈춰 서고, 누구보다 천천히 걷기로 한다. 얇은 패딩 점퍼를 걸쳐 입고 귀도리 모자를 눌러쓴다. 바람 때문일까, 낯섦 때문일까. 제주 공기는 아직 차다.
바다와 마을길을 넘나드는 이 길은 해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이기도 하다. 당근밭과 아직 만개하지 않은 유채꽃밭을 따라 걷다 보면 해녀와 어부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해신당인 각시당을 만난다. 21코스의 중간 스탬프 지점인 석다원을 지나 하도 해수욕장에 이르는 해안길 중간에는 해녀 불턱이 있다. 불턱은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언 몸을 녹이기 위해 바닷가에 돌담을 쌓아 만든 공간이라고 한다. 불턱 사진을 찍어 친구에게 보내니 친구는 이렇게 답한다.
'나에게도 불턱이 있으면 좋겠어.'
그래, 모두에게 불턱이 있음 싶다. 내가 아는, 각자의 해방을 위해 손잡은, 깜깜한 터널을 지금 막 통과한 이들 모두에게 젖은 옷을 갈아입고 추운 몸을 덥힐 불턱이 있음 싶다. 아니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그 불턱이 되어주었으면 싶다.
하도 해수욕장을 지나 철새 군락지 앞에 머문다. 왜 제주 새들은 이렇게 비대한가, 잠시 궁금했는데 열일곱 살 딸이 톡으로 이런 추측을 해 온다.
-뭘 많이 먹나?
=물살이?
-그럴 수도 있고 사람들이 먹이를 많이 줄 수도 있고 쓰레기를 먹는 걸 수도 있고.
물론 모녀의 대화는 '멀리 날아갈 새들이 영양분을 저장해 놓기 때문'이라는 딸 아버지의 팩폭으로 종결되었지만, 나는 딸의 시선이 좋다. 작고 여린 세계를 놓치지 않는 그 시선이 아련한 만큼 따뜻해서 좋다.
지미봉 탐방로 입구 벤치에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른다. 틈날 때마다 주저앉고, 숨 쉬듯 멈춰 서고, 누구보다 천천히 걷기로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는 중이다. 등산화 끈을 풀어 발에게도 쉴 틈을 줄 참이었지만 밀려드는 후발 주자들에게 벤치를 양보하고 일어선다. 실은 양보라기보다는 도망이다. 여전히 길에서 만나는 이들과 말을 섞고 시공간을 나누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도망이다.
지미봉으로 향하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경사가 급한 길일수록 상체를 앞으로 굽히지 않아야 덜 힘들다. 마치 등을 누군가가 밀어주는 느낌을 만끽하는 편이 좋다. 숨이 가쁠수록 숨은 뱉어낸다. 숨이 가득 찼으니 마시기 전에 뱉어내는 일, 그 일이 이른바 숨이 찰 때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숨을 뱉어내며 지미봉 정상에 올라서니 비록 미세먼지로 사방은 뿌옇지만, 성산일출봉과 우도, 토끼봉뿐만 아니라 뉴욕제과 롤케이크 같은 파스텔톤의 밭과 땅이 한눈에 든다.
지미봉에도 오래 머물진 못했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싶었는데 일요일이다. 하산길은 올라온 길만큼 가파르고 배낭 무게도 제법 나가니 더 주의해야 한다. 내려가는 길과 반대 방향으로 올라오는 한 여성이 묻는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조금 더 가세요.
-올라온 것보다 더 많이 올라가야 하나요?
=아,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실은 올라온 것보다 더 많이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길을 물으면 어르신들이 "조금만 더 가면 돼요."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종달바당에서 올레길 21코스는 끝난다. 종달리에 잡은 두 번째 숙소 체크인 시간은 4시간 후. 일단 짐을 부리고 발을 쉬게 하고 허기를 달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종달리 골목을 쏘다니다 제주로 떠나기 전, 제목이 인상적이어서 메모해 두었던 바로 그 카페를 발견했다.
<바다는 안 보여요>
생맥주와 떡볶이를 시키고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낮술을 마셨다.
정녕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