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제주도보여행2/20230107
2019년 8월, 종일 실내에서 진행한 워크숍 덕분에 창문 너머로만 눈에 담아두어야 했던 파란 하늘. 그것이 제주에 관한 나의 마지막 기억이다. 거짓말 같지만 비행기를 어떻게 타는지, 공항까지 어떻게 갔는지 모두 잊었다. 나는 산골에 산다. 지리산 북부 능선을 조망할 수 있는 인구 이천 명 남짓의 작은 마을이 내가 사는 곳이다. 이곳에서 시나 도 경계를 넘기 위해서는 40여분 차로 이동해야 하고,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이동한 곳에서 다시 1시간에서 2시간가량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제주에 가서 렌트는 하지 않기로 했으니 자차운전도 최소한으로 하고 싶다. 차는 40분 거리의 공용주차장에 세워 놓고 공항까지 시외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배낭 허리끈을 알맞게 조이고 걸음을 내딛는다. 아직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을 뿐이지만 나는 약간 들떠 있다. 무거운 배낭을 몸으로 짊어지면 어쩐지 더 꼿꼿해지는 기분이 든다. 묘한 자신감이 생긴다.
버스는 고속도로를 지나 시내 중심부로 들어서자 속도를 낮췄다. 토요일이어서인지 도로에 차가 많다. 고속도로 주행 시 꽤 시간을 세이브해 두었던 버스가 거의 정시에 터미널에 도착할 만큼 시내는 붐볐다. 여기서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타야 공항에 도착할 수 있다. 5년 전쯤의 기억을 더듬어 공항행 버스 정류장을 찾아봤지만 기억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핸드폰 길 찾기 앱은 알려준다. 공항행 버스는 터미널에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되는 곳에 선다는 사실을. 꽤 먼 거리를 되돌아가야 했지만 아직 시간은 넉넉하다. 헤매고, 멈추고, 돌아가는 길을 마다하지 않기로 한 여정이니 서두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마음과 몸은 자주 엇박자여서 나도 모르게 빨라지는 발걸음을 어쩔 수가 없다.
공항에 도착해서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배낭 무게를 확인하는 것. 모바일 체크인으로 좌석 배정은 마쳤으니 기내에 매고 들어가기로 작정한 짐 무게만 확인하면 된다. 항공사 창구로 가서 묻는다.
"무게만 체크하고 싶습니다. "
"9킬로그램입니다. 기내수하물로 가능하세요."
8.6킬로그램에서 9킬로그램으로. 그 사이 더 넣은 것은 없으니, 반올림이구나. 후하기도 하셔라. 다시 배낭을 둘러 매고 2층 국내선 출발 장소로 이동한다. 생체등록을 유도하는 문구들이 눈에 띈다. 생체까지 등록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너무 많이 여러 번 국가에 등록된 몸이다. 주민등록과 운전면허등록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오 그러나 세월의 무상함이여.
"고객님 혹시 최근 신분증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23년 전, 귀농 직전 새로 발급받은 주민등록증을 내밀자 공항 직원이 던진 질문이다. 갱신한 지 10여 년이 안된 운전면허증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 조차 사진 속의 나와 게이트 앞에 선 나를 일치시킬 수 없는 모양인지 공항 직원이 다시 묻는다.
"생년월일을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 기억한다는 것, 잊지 않는다는 것은 이토록 절실한 일이다.
비행기는 이륙과 동시에 착륙한다. 활주로를 빙빙 도는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질 지경이다. 주말 제주 공항은 렌트를 하려는 사람들로 주차장이 더 북적댄다. 원래대로라면 제주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서 그곳에서 해안도로를 일주하는 201번 버스를 타고 숙소로 이동할 계획이었지만, 사나흘 먼저 제주에 당도한 찌니가 친구와 함께 공항 픽업을 자청해 주었다. 찌니의 친구는 내가 차에 오르자마자 선우정아의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세팅해 놓았고 비건 식당을 찾아가 주었으며 밤하늘에 떠오른 달빛이 밤바다에 부서지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도록 차를 세워주었다. 자칫, 번다해서 초조했을 수도 있던 제주에서의 첫 밤은 그들 덕분에 다정하고 따뜻했다.
그리고 바다에 비친 달빛을 봐 버렸을 때,
그때, 나의 제주 여행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