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싸다

-제주겨울도보여행1 /20230106

by 정상순

등산화를 다시 샀다. 결혼할 때 혼수로 등산화, 바람막이, 고도시계 등등을 구입한 후 20년 만이다. 새로 산 등산화에는 생명평화문양 택이 달려 있다. 생명평화를 으뜸 가치로 삼고 있는 마을 공동체에 살고 있는 나는, 유행 이상의 길조려니 내 맘대로 의미부여를 한다.


“너 제주도 가면 틀어박혀 있을 줄 알았는데 걷기로 했구나.”


친구가 이렇게 말했을 때, 그때 알았다. 걷는 일이 나에겐 나만의 방에 거하는 일이라는 것을. 일주일 동안 주구장창 걸을 예정이다. 처음엔 비건식당과 비건카페를 검색하기도 하고, 일주일 연박 가능한 조용한 숙소를 찾기도 했다. 하지만 완벽한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기 위해서 걷기로 했다. 머물지 않기로. 걷기로. 시끄러운 마음, 미워지는 사람, 벗어나고 싶은 일들로부터 머물지 않고 걸으며 그저 나에게, 머물기로 했다.


체중의 10퍼센트가 도보여행에 적당한 짐 무게라 한다. 그러나 내가 꾸린 짐은 8.6킬로그램. 체중의 10퍼센트라면 배낭의 총량은 6킬로그램이어야 한다. 노트북도, 책도, 수첩도, 필통도 모두 가져가지 않기로 했다. 메모와 검색과 기록은 모두 핸드폰 하나로 해결하기로 했다. 그런데 대체 내 배낭에는 무엇이 들어있기에 짐의 무게가 8.6킬로그램에 육박한 걸까.


아무 길이고 걷다가 하루는 한라산에 오르기로 했다. 아이젠과 스틱과 스패츠가 필요한 코스다. 바람막이는 해안도로를 걸을 때와 겨울산을 오를 때 모두 필요하다. 바람막이를 입고 겨울산에 오른다면 안쪽에 내피용 경량패딩도 받쳐 입어야 한다. 겨울이다. 그래서 여름보다는 짐이 무거울 수밖에 없겠다.


하의: 기모등산바지1, 평지용스판바지1, 와이드팬츠1, 잠옷바지1

상의 : 바람막이1, 경량패딩1, 후리스1, 패딩조끼1, 폴리에스텔T3, 히트텍1, 잠옷셔츠1

기타1 : 양말3, 언더웨어 상하의 3, 손수건2, 장갑2(얅은거1, 두꺼운것1), 발목워머1, 숙소용 슬리퍼, 선글라스

기타2 : 텀블러1, 물통1, 보이차, 귤피차, 비상약, 선크림, 토너, 로션


뺄 건 없다. 상의를 두벌 더 넣었다가 뺐다. 겨울이라 빨래가 쉽게 마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반나절을 걸을 것이고, 상의를 하루에 두 번 갈아입을 일은 없을 것이다. 집 근처 생협 매장에서 에너지바와 약과, 공정무역초콜릿을 살까 하다가 관뒀다. 안 먹어도 되는 음식이고, 제주에서도 살 수 있는 것들이다.


끝까지 고민했던 물건은 슬리퍼. 아빠가 돌아가신 후 본가 짐을 정리할 때 가져온 슬리퍼다. 볼이 넓은 내 발에 잘 맞고 모양새가 좋은 갈색 발판을 지닌 슬리퍼. 꽤 묵직한 이것을 가져가기로 한다. 그냥 그러고 싶은 내 마음을 보아주기로 한다. 짐을 쌌으니 이제 남은 것은 꿀잠. 내일은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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