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를 소거하고 존재와 만나기

-월간 정상순 7월호 <딸들의 여름밤_여름밤에 쓰는 네 통의 편지4>

by 정상순

마지막 편지입니다.

생각해 봤어요.

왜 이 편지를 쓰겠다고 했는지.

사망 선고를 받은 아빠의 몸이 장례식장으로 가기 위해 휠체어에 앉아 있을 때였는지, (고층 아파트 엘리베이터는 너무 좁아서 집에서 죽은 아빠를 옮기는데 침대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때문에 세상을 떠난 아빠는 휠체어에 ‘앉은 채’ 주차장까지 운반되었지요. 16층에서,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는 지하 2층까지, 들것으로 내릴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가족장을 마치고 아빠의 고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내가 누구를 잃은 거니?”라고 엄마가 물어본 순간이었는지, 아니면 그보다 더 먼저, 아직은 숨이 붙어 있는 아빠에게 “사랑한다.”라고 말한 순간이었는지, 아니면 서울과 아빠의 고향을 거쳐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와 쏟아지는 별들 속에서 아빠를 발견한 순간이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또 생각해 봤어요.

네 통씩이나 쓸 일인지.

한 통으로 충분하지 않았는지, 기승전결 혹은 발단-전개-절정-결말의 4단계 구성이 습이 됐는지, 만원을 받았는데 한 통만 쓰기엔 너무 놀고먹는 거 같았는지, 그렇다면 저는 이때껏 한 통에 이천오백 원짜리 편지를 쓴 건지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기록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아니, 어쩌면 기억하고 싶었는지도요.

그게 아빠에 대한 것인지 혹은 엄마인지 아니면 가족인지 그것도 모르겠어요.

실은 그냥 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요.


처음엔 거창한 계획이 있었어요. 김경숙 할머니가 읽어주는 그림책, 이라는 제목의 오디오북을 떠올렸어요. 6년 전 엄마와 함께 살 때 들은 이야기를 잘 엮어, 해방 직후에서 6.25 전쟁까지 엄마를 주인공 삼아 ‘대하 서사시를 만들어 내리라!’ 야무진 꿈도 꾸었지요.


하지만 엄마의 눈은 그림책의 글씨를 읽어내기엔 엄마만큼 나이를 먹었고, 엄마의 현재는 소학교 시절 김구 선생님 무릎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는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지 못했죠. 70여 년 전 북으로 끌려간 사람이 자신의 아빠인지, 남편인지 그것조차 헷갈리는 김경숙 씨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서 제게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수요일과 목요일 9시를 기다리는 분 많죠.

그래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얘기예요. 저도 이 드라마가 참 좋아요. 우영우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면, 드라마는 판타지에 가깝죠. 애슐러 르귄을 비롯한 수많은 페미니스트 작가가 새로운 세계를 논할 공간으로 미래를 설정하고 그곳에서 판타지를 만들어 냈잖아요. 그래서 우영우 주변 인물들은 가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미래에서 온 존재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우영우를 해하는 존재가 아닌 조력하는 존재들이라는 점에 확실히 마음이 놓이죠.


그래서 당연히 질문도 남아요. 우영우가 사건을 ‘잘’ 해결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존재라는 설정이 무너진다면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우영우에게 환호할 수 있을까.

아빠가, 자신의 사지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기고서야 생리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 때, 저는 ‘존중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려야만 했어요. (떠올려야만 했다고 말하고 있어요.) 엄마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헷갈려하고, 삼십 분 전에 먹은 점심이 김밥인지 정식인지 기억해내지 못할 때에도 그래야만 했어요. 저는 아주 오랫동안 이 사회를 통해,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없는 존재들, 소위 밥만 축내는 존재들에게 최선을 다해 가혹해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여전히 자신이 없어요. 제가 엄마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우리 아이들이 나의 수족이 되는 상황을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내 아이들이 아닌 그 누구에게라도 그런 일을 하게 한다는 걸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사실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엄마가 이렇게 말할 때 그 마음을 알면서 모르는 척을 해요.


“내가 왜 이렇게 우리 딸을 고생시켜…”

무작정 그 말을 못 하게 해요.

“그런 말 하면 내가 더 힘들다구!”


으름장을 놓으며 미안해할 기회도 주지 않아요.


생각해보면 유용함을 증명하기 위해 기를 쓰는 일조차 성별화 되어 있어요.

뭐라도 하려는 건 늘 여성이에요.

쓸모없는 세상에 쓸모를 만들어내느라 늘 쓸모 있는 일을 하면서도,

마침내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찍혀버리는 건 늘 여성이었으니까요.


이제껏 보내드렸던 세 통의 편지를 찬찬히 살펴봤어요. 쉼표와 마침표를 바꿔 쓰거나 찍은 데 또 찍은 적이 여러 번 있더군요. 요즘은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낼 때도 오타를 많이 내요. 돋보기 없이 책을 보는 일은 상상할 수 없고, 그나마 자주 눈을 쉬어 줘야만 합니다.


이 편지를 읽는 구독자들의 연령대가 다양한 걸로 알아요. 십 대부터 오십 대까지 스펙트럼이 넓은 구독자를 만나고 있는 저는 참 복이 많아요. 하지만 어떤 분들에겐 이 편지의 내용이 너무 먼 얘기이거나 관심사 밖의 일일 수도 있겠어요. 오십 세를 넘어서면서 삶의 방향을 ‘단순함’으로 잡고 있는 저에게 새로운 경험이나 모험 같은 단어는 어쩐지 어색해요. 하지만 만약 단 하나의 모험이 허락된다면 이런 시도를 해 보고 싶어요.

“쓸모를 소거하고 존재와 만나기”


엄마는 탁자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해요.


“어쩜 이렇게 조용하니?”


이 순간, 말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걸, 그저 함께 하늘을 바라보면 된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요.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쓸데없는 짓을 너무 많이 하면서 살아왔다는 걸 조금은 알겠어요.


이 편지를 왜 쓰고 싶었는지,

그것도 알겠어요.

저는 혼자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손을 잡고 싶었어요.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싶었어요.


맞잡은 손의 감각을 기억하며

단 하루를 살아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오늘 엄마랑 드라이브를 했어요. 그때 엄마가 했던 말을 마지막 인사로 대신할게요.

읽어주어 고맙습니다.

언젠가

만나요.


“시골사람 서울 사람 모두 행복하기를.”


2022년 7월 30일

월간 정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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