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식구, 려강에게

by 정상순

려강. 내가 2월에 다녀온 두 번째 제주 얘기했었나?

두 번째 제주는, 뭔가 엉망진창이었어. 출발부터 아슬아슬했지. 비행기를 놓칠 뻔했거든. 비행기 주행시간의 갑절을 걸려 도착한 숙소는 어둠을 가르고 내리는 비 때문인지 을씨년스러웠고 비 갠 후 아침, 내가 무던히도 밟고 나가야 할 땅은 간밤의 물기를 머금은 채 축축하고 미끄러웠어. 그런데도 도리가 없어 무턱대고 걸었어. 9킬로그램짜리 배낭을 메고 4박 5일간 100킬로미터를 걸었어. 멈추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저 앞으로 나아갔지. 윤슬과 함께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며 멍 때리기 딱 좋은 카페와 발효빵을 오물거리며 신발끈을 조금 풀어놓아도 좋았을 빵집을 떠올린 건 마지막 날의 일이었어. ‘거기서 잠시 쉬었으면 좋았을 걸, 잠깐 멈춰도 좋았을 걸.’


돌이켜 보면 나는 늘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라 가치 있는 일을 하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야. 근데 그 열망이 결국은 나를 아프게 하고 자신의 돌봄을 늘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며 타인 속에서 나를 증명해 내야만 안심하는 삶으로 치닫게 했다는 생각이 들어. something이 아니어도 되는데, 우리는 어쩜 모두 nothing인데, something이라는 착각 속에서 나를 늘 속여왔달까.


계획 세우길 좋아하는 나는 아직, 려강이 우리집을 떠나고 나서 내가, 우리가 어떻게 지낼지 밑그림을 그리지 못했어. 파란 수면바지를 입고, 번개머리를 한 려강이 계단을 내려오며 "굿.... 굿모닝!"이라고 외치길 기다릴 것 같아. 마라상궈를 먹을 때면 틀림없이 려강을 떠올리겠지. 산내는 3월까지 쌀쌀할 테니 불을 땔 때마다 개구쟁이 얼굴을 하고 잔가지를 주워 오던 려강을 생각할 거야. 려강의 웃음소리가 , 거실 탁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던 뒷모습이 그리울 거야.


엉망진창이었던 것 같았던 지난 제주행은 실은,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시작됐어. 광주행 버스 기사님께서는 비행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어디서 택시를 타야 하는지 운전하는 내내 자세히 알려주셨고, 택시 기사님은 속도위반을 감수하면서까지 도로를 질주하여 공항 문턱에 내려주셨어. 늦은 숙소 체크인을 걱정하던 호스트는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어주었고, 하루 종일 뛰어다니느라 끼니를 챙기지 못한 내 배낭엔 숙경언니표 김밥이 들어있었지. '왜 나는 멈추질 못하고 걷기만 하는지 모르겠다'는 투정 어린 여행 후일담에 상담 선생님은 '완전히 집중해서 걸었다는 의미'라며 격려해 주셨단다.


지난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동안 려강이 우리의 식구가 되어 줘서 나는 정말 기뻤어. 려강 덕분에 나는 함께 사는 일이 어떤 일인지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아. 함께 살아 보자는 나의 초대에 응해 준 그 순간부터 내 배움은 시작되었어. 인류애가 소진될 때마다 가장 가까운 이에게 다정해져야 한다는 걸, 그걸 놓쳐서는 안 된다는 걸 려강 덕분에 환기할 수 있었어.


려강이 떠나면 많이 허전할 거야.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확실히 그런 생각이 들어. 소중한 인연을 선물해 줘서 정말 고마워. 무엇보다 편안한 사람이 아닌 ‘나’를 견뎌주어 고마워. 나는 려강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어도, 플라잉 요가를 중간에 멈춰도, 아작페탱자를 때려쳐도, 수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않아도 려강을 사랑해. 왜냐면 이미 려강은 충분하니까. 게다가 우리의 식구였으니까.


려강의 하루하루가 편안했으면 좋겠어. 따뜻했으면 좋겠어. 려강의 소중함을 매일매일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려강이 일 년 남짓 머물렀던 우리집이 앞으로도 쭉 려강의 또 다른 집이었으면 좋겠어. 그러다 문득 쉬고 싶어지면, 잠시 멈추고 싶어지면 그때 또 들러 주면 좋겠어.


제주에서 이 풍광을 오래도록 바라봤어.

너드커넥션 노래를 듣다가 잠시 이어폰을 빼니

파도랑 바람소리가 들려오더라.

그게 또 참 좋았어.

그때 려강 생각을 잠시 했어.

려강도 멍 때리는 시간을 환대하길 바라.

그리고

우리

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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