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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상순 Jun 07. 2023

엄마의 아침 식탁 15

정말 ‘인간’인가

고사리 포장을 시작했다. 올해도 수확량이 줄었다. 고사리를 십 년 가까이 주문해 온 친구의 말처럼 기후 탓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더 게을러졌고 풀의 활력은 더 왕성하다. 하지만 6월 초입,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뜨기까지 도시인들에게 산책하기 좋은 저온의 날씨가 작물엔 치명적이다. 봄이 되어도 얼어붙던 고사리는 한낮의 태양 아래 맥을 못 추다가 어르신들 말씀대로 '삶겨'버렸다. 새로운 해를 맞이할 때마다 고사리가 고개를 드는 시기가 늦어진다. 4월엔 그렇게 가물더니 고사리 수확과 건조의 절정기인 5월엔 폭우가 내렸다. 재작년엔 고사리 주문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제법 결의에 찬 글이었는데 이제 그런 결기는 일상 속에 희석되었고 올해 나는 주문량의 절반씩만 보내겠다는 문자를 담담히 전송한다.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삼주 차에 접어드니 슬슬 하루의 사이클이 보인다. 이제는 나만의 시간을 꾸려내는 일도 가능하다. 엄마가 일어날 때까지 작은 창이 난 작은 방에 앉아 책을 읽는다.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편인데 수업 준비를 위한 책들을 빼면 주로 SF소설이나 SF작가들의 에세이다. SF소설에 흥미를 느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라면 조애나 러스의 문장을 빌어오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 것이다.   


"문화의 성은 남성이다... 가부장제는 남성의 관점에서 스스로를 상상하고 그린다. 여성의 문화가 있지만 그것은 지하에 있는 비공식적인 소수 문화로, 우리가 공식적으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 생각하는 것의 작은 구석을 차지한다. 우리 문화의 남자와 여자는 단일한 관점에서 문화를 상상한다. 바로 남성의 관점이다." -조애나 러스 지음, 나현영 옮김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 포도밭 출판사, 2020, 193~194쪽 부분 발췌


간단히 말하자면 여자들에게 이 세계는 좁다. 여성들에게는 '이 세계의 프레임이 삭제하고 재단하는 방식에 저항하는 것' 그것이 SF라는 놀이터의 목표일 것이다. 둘째 딸은 물리학에 관심이 많다. (김상욱의 팬이다) 나도 딸의 그늘 아래서 원자, 양자역학 이런 단어들이 떠도는 영상을 보고 있다. 최근에 본 영상은 영화 '컨택트'에 관한 영화비평가와 물리학자의 대화였다. 여러 영상들을 겹쳐 보기도 하고 반복해서 보기도 해서 어떤 영상에서 이런 문장이 발화됐는지 기억이 어렴풋하다. 건조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이것은 결국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저 촘촘한 배경을 설정해 놓고, 저런 캐릭터들을 등장시키고, 저런 사건을 밀고 나온 이유가 결국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던 거였다고? 그게 다였다고?'  어이가 없다기보다는 맥이 빠졌다. SF라는 무대를 택한 여성들의 바람이 삭제와 재단이 아닌 연대와 펼침으로 연결된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 인생 이야기('컨택트'의 원작 소설 제목이다)의 당신은 그저 휴먼에 머물 수만은 없지 않을까.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나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나머지, 별들이 주인공인 밤하늘을 보면서도 인간을 생각하고, 개성 넘치는 생물들로 가득한 심해를 보면서도 인간을 생각한다.... 낯선 생물들이 공생을 통해 우리에게 마음 따뜻해지는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고집해 왔던 범주를 내려놓고, 우리의 통념을 무너뜨려야만 그들을 겨우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김초엽, <책과 우연들> 열림원, 2022, 22쪽


나의 분통에 가까운 어이없음은 이 문장으로 달래졌다. '그렇지 않다'라고 단정하는 대신 '꼭 그렇지는 않다'며 SF소설 작가다운 태도를 보여 준 맥락은 더 좋았다. 인간 바깥의 세계에 매혹되는 인간들이 우글대는 세상을 혼자 상상하며 웃었다.


사실 고사리 포장에 엄마의 노동력을 십분 써먹으려던 나의 목표는 좌절되었다. 어제 엄마는 고사리를 지퍼백에 담다 말고 울었다. 나는 엄마가 왜 우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고사리를 한 줌씩 집을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울먹거리다가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왜 그래? 응? 엄마?' 어리둥절한 내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면서 엄마는 입안 가득 울음을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얼마나 힘들었어. 이걸, 이 고사리들을 이렇게 하느라고. 이거 이렇게 하느라고 다들 얼마나 힘들었어..."


평생을 서울내기로 살아 농사는커녕 고사리를 어떻게 끊고 삶고 말리는지 알지 못하는 엄마는 말린 고사리에서 무엇을 봤을까. 엄마의 '다들'은 나일까, 농사꾼일까, 그 다들은 정말 사람이기만 할까. 오늘도 엄마를 울리면서 고사리 포장을 함께 해도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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