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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상순 Sep 04. 2023

효원언니에게

-하숙집 주인을 자청해 준

언니, 하숙생 떠나고 첫 밤, 만끽했어? 

나는 한 달이 훌쩍 지난 느낌인데 하숙집 주인의 시간은 좀 달랐을 것도 같네. 


작년 봄까지만 해도 이랑이가 서울로 인턴십을 가게 되면 당연히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 지내게 될 거라 생각했어. 이모가 시내에 사니 이모네도 선택지에 들어갔지. 근데 여름이 되기 전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어. 치매를 앓고 있던 할머니를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그 집에 혼자 남겨둘 수 없었고 할머니는 이랑이의 두 번째 선택지였던 이모네서 지내게 되셨어. 마침 사촌 언니들도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이모네는 오랜만에 사람들로 북적였어. 이모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던 삼촌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할아버지의 고향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맞아. 세 번째 선택지마저 없어진 셈이지. 


언니는 괜찮다고, 조카인 이랑이를 보내라고 했지만 단기기억장애를 앓고 있는 엄마를 돌보는 언니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어. 그냥 막연히 나눠지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 걱정이 전혀 안 된 건 아니지만 암담하진 않았어. 그때 문득 언니를 생각했고 문자를 보냈지.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지만 왠지 희망적이었어. 내가 구구절절 사정을 늘어놓았을 때 언니는 '너무 되지, 2주 말고 한 달 있어도 되지'라며 날 무장해제 시켰어. '집에 한 사람 더 들이는 일이 이런저런 신경 쓰이는 일인데 환대해 줘서 고마워요.'라는 내 인사에 언니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


"아유 무슨. 니 딸인데 내 딸이지."


참 낡고 닳은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말, '니 딸이 내 딸이지' 이 말이 이렇게 다정하고 따뜻할 수 있다는 걸, 언니 덕에 알았어. 왜냐면 난 언니의 그 한 마디 때문에 너무나 안심이 되었거든. 작년 6월부터 올해 2월까지 혈연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과 한 지붕 아래서 사는 경험을 했어. 아이들의 학교 선배였고 나도 수업 시간에 만나 인연을 맺은 졸업생이었지. 이랑이를 언니네 보내고 그 사람 생각을 많이 했어. 8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그 친구는 어떤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살았을까. 동시에 언니는 이랑이를 식구로 들인 지금 어떤 마음일까. 


나는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더라. 8개월 동안 까다로운 나를 감당해 준 그 친구도 고맙고, 한 달 동안 살 데가 필요하다는 옛 후배의 긴장된 요청을 어루만지며 수용해 준 언니도 고맙고. 이랑이는 자신을 살펴주는 부모 아닌 사람들 속에서 안정감을 느꼈을 거고, 그건 부모가 줄 수 없는 세상인 것 같아. 그 세상을 언니가 열어줘서 그게 참 고마워. 이것저것 마음에 안 드는 점도 있었을 테고, 잔소리를 하려도 조심스러웠을 거야. 근데 나, 이랑이에게 일일이 이래라저래라 안 했어. 그 애가 언니와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야단도 맞고 혼나기도 하고, 말 들을 일 안 만들려고 전전긍긍하기보단 직접 부딪히고 경험해 봐야 할 일이라 여겼어. 맞아. 언니한테 죄다 넘겼어.     


올해 내가 마음에 간직한 문장은 이거야. 

'한 없이 허물어질지어다'

경계 짓고 선 긋고 나와 남을 가르기보다 더 많이, 가없이 허물어져야 비로소 만나게 될 세상을 환대하고 싶어. 나의 소망을 언니가 실현해 줬어. 고마워. 되갚아야 한다는 생각은 놓아버렸지만 허물어져서 언니에게 가닿는 순간은 간직하고 싶네.


엄청 바쁜 언니와 점심 식사를 함께 할 날이 너무 멀리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언니, 사랑해. 30여 년 전 그때부터 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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