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자존감 공부

전미경,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벌써 20년 전이군요, 20대 초반에 심리학 서적들을 많이 탐독했습니다. 대학생이 되면서 갑자기 주어진 자유 시간은 '나'에 대해 사색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청소년기 강제된 소속감에서 벗어난 것이 어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알고 싶은 게 많은데 전공 서적은 들춰보기 지루해 보였고, 서점을 전전하며 심리학 서적을 거울삼아 나를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심리학 저서들은 보통 본인의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니즈(needs)가 있을 때 펼치게 되고, 필요에 의해 읽게 되니 집중하여 읽게 됩니다.


저는 중소 규모의 종합병원에서 일하다 독일행이 결정되어 사직을 하고 일을 쉬고 있습니다. 동료들은 대학 병원에서 번듯한 대학 교수로 커리어를 쌓고 있지만, 저는 나름 입소문 난 신경과 전문 클리닉에서 일하며 성취감과 소속감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연구와 논문 작성 재능보다 임상 현장에서 환자들의 세세한 고충과 아픔을 해결하는 데 더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제 역할을 통해서 자존감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인간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는 상사가 장악하는 조직 생활에서 철저히 '을'이 되지 못했습니다. 좋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 옆에 장기간 있으면서 저의 자존감이 침식당했습니다. 구성원을 존중하지 않는 리더가 이끄는 조직은 비도덕적이고 험담에 열을 올리는 곳으로 변질됩니다.


제가 가진 여러 페르소나 중에서 직업이 차지하는 것이 아주 컸나 봅니다. 처음으로 쉬면서 한 번도 떠나보지 않은 진료 현장에서 나오면서, '의사'를 뺀 '엄마'와 '부인' 역할만 유지하는 것이 어색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시간이 쓸데없이 많아지면서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일을 쉬면서 무기력함이 수시로 엄습할 때가 있습니다. 일에 몰입하고 성취감을 얻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요.(다시 일을 하다 보면 금방 또 휴식을 갈구하겠죠.)


한편 뭐든지 잘하고 싶고 다 갖고 싶은, 욕심 많은 딸에게 '인정 욕구'가 지나칠 때를 종종 목격합니다. 자존감을 형성하기엔 너무 어린 딸을 대신하여 '자존감'에 대해 공부하고자 이 책을 폈습니다. 부모의 자존감이 바로 서야 우리 딸들의 자존감도 높아지겠죠.




이 책엔 장점이 많습니다. 저자의 문체가 요란하지 않고 검소하여 주장이 진솔하게 다가옵니다. 독자들을 가르치고 교정하려 드는 책도 많은데 그런 점이 거의 없는 책입니다. 과거의 트라우마나 개인의 성격, 행동의 분석에 너무 치중하지 않고, 최근의 상황, 맥락에 맞게 융통성 있고 현실성 있는 해결책을 줍니다.


오늘날이 젊은 세대가 살아가기 팍팍한 세상이라면, 그건 그들이 성공할 확률이 낮아서가 아니라 실패를 경험한 후 다시 도전하고, 또 실패해도 되는 시기라는 것을 용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정신과 선생님들의 책처럼 환자들과의 상담 내용을 토대로 글을 전개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심리 상담을 하지만, 신경과에서는 수면 인지 교육 외에는 상담 치료가 거의 없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들의 정신 분석, 심리 상담에는 배울 것이 많습니다. 환자들의 말로 표현된 것 너머의 무언가에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배웁니다.  


지적 능력과 자존감은 상관이 없습니다. 자존감은 직업에서의 성취도와는 관계가 있습니다..(중략).. 자존감은 이런 외부적인 조건보다는 대인관계 능력, 예상치 못한 역경을 극복하는 회복탄력성 등과 더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의사라는 직업 자체가 제 자존감을 키워주지 않았습니다. 전공의 저년차 시절 도제식 수련 분위기 아래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스스로 기능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환경에서는 자존감도 낮아지고 스트레스에 예민하고 불안해집니다. 오히려 전문의가 된 이후 쌓인 경험치, 환자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자신감, 환자분이 호전되었을 때 오는 성취감이 자존감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첫째는 개인마다 타고난 기질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동안 자존감을 논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존감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나에게 존중의 거울을 비춰주는 타인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전미경 선생님은 트라우마를 자존감과 연결하여 생각하기를 지양합니다. 과거의 나보다 현재의 자신에게 집중해야 하는 근거를 조목조목 짚어서 얘기하여 독자를 설득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심리학 책들은 내면의 습관적 인지 패턴을 고쳐라!라고 역설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강요하면 하기 싫어집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나만의 사고패턴에만 너무 집중하지 말고 나의 왜곡된 생각을 비춰볼 수 있게 '타인'이라는 거울을 활용하라고 합니다. 외부와 소통하고 대가 없이 선의의 경험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인간관계를 경험할 수 있는 여행을 권고합니다.




자존감의 기준은 자신의 내부에 있습니다. 인정과 칭찬의 기준은 자신의 외부에 있습니다. 때문에 인정과 칭찬에 중독되면 쉽게 가짜 자존감이 됩니다.(중략) 자신의 생존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에게서 칭찬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지요.


병원에도 조직과 서열이 분명합니다. 저의 생존권을 갖고 있는 분들, 만사를 자기 뜻대로 통제하려는 분들에게 찍히지 않기 위해,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 영혼을 팔았던 흑역사가 떠오릅니다. 그런 시기엔 자존감이 바닥을 칩니다.


예전엔 아이를 무조건 칭찬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는데, 칭찬의 부작용을 여러 차례 경험하였습니다. 부모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 목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의 칭찬을 부모의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전미경 선생님이 기술하신 대로 칭찬에는 평가의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잘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북돋아주는 것은 필요하지만 표현의 수위와 상황을 현명하게 조절해야 하겠습니다. 예민한 아이를 '타인의 평가'라는 틀에 가두지 않으려고 고심해봅니다.

전미경 선생님은 솔루션을 알려줍니다. 잘한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세요. 'OO아, 너무 좋겠다. 정말 기쁜 일이네'. 보상과 평가가 개입하지 않은 선의의 경험을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 하라고 조언합니다. 매일 '수학 문제집 2장 풀면 오늘 영화 10분 더 보게 해 줄게' 이런 말을 늘 주고받는 게 현실인데, 배움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진정한 나 자신이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기능하면서 존재하는 멀티 아이덴티티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중략) 여러 정체성을 운영하는 중심축인 '자기다움'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를 '나만의 시그니처'라고 표현합니다. (중략) 우리가 자존감을 갖고 인생을 산다는 것은 '나만의 시그니처'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말이고 이 책의 핵심 어휘 중에 하나입니다. 이 책을 덮고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액션 플랜은 저의 몫입니다.


신경과학을 둘러싸고 정말 다양한 전문 분야가 있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임상 신경학은 정말 작은 일부입니다. 신경 생리학, 인지 신경학, 행동 신경과학, 인지 철학, 신경 윤리학, 신경 미학 등.. 그들의 현재 위치와 성과물들을 스캐닝하다 보면, 내가 아는 임상 지식이 보잘것 없이 여겨지고 움츠러들 때가 습니다. 한편 익숙한 일에만 안주하여 반복하면 성취감이 없고 무기력해집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과 위치를 객관화시키고 손이 뻗지 않는 영역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걷어냅니다. 사소하더라도 나의 능력을 성장시킬 수 있는 공부, 일, 직장을 찾아봅니다. 가족들의 자존감도 애정을 갖고 지켜봐 줍니다. 결핍된 부분을 뜯어고치려 하지 말고 상대방의 '시그니처'를 찾아봐주고 존중하고 지켜주는 노력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매너리즘에서 허우적 되는 순간에 환기를 시켜주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휴식 (C) 2020. 익명의 브레인 닥터 All rights reserved.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