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간의 여행이 아닌 2년의 체류를 위해 들어온 독일에선 어설픈 영어만으로는 생존이 어려웠다. 물론 생존 능력이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의 경우엔 독일어 때문에 마트에서 장을 보기조차 힘들었다. 육안으로는 식별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맘 편히 구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무엇보다 현지인들이 내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나의 문제를 타인의 문제로 둔갑시키기) 하지만 신기하게도 언어의 장벽은 시간이 지나면서 낮아진다. 반복으로 인한 학습, 반복으로 인한 적응은 나같이 생존 능력이 버벅거리는 사피엔스에게도 찾아왔다.
적응 과정 이후엔 생존 그 너머의 것이 필요했다. 동쪽 세계의 문화권에서 온 내가 독일 서쪽 세계에서 문화적 괴리감을 덜 느끼기 위해서, 이 곳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공부가 필요했다. 독일 어느 지역에 가건 아무것도 모르는 깜깜이로 돌아다니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좀 더 알게 되면 Lockdown으로 갇혀 지내는 느낌, 이방인의 자격지심이 조금은 누그러질 거라 생각했다.
이 책은 한 국가와 민족의 정치 역사를 연대기 순으로 서술하는 고리타분한 책이 아니다. 500쪽이 넘는 분량이지만 설명을 보충하는적절하고 흥미로운 사진이 꽤 많이 삽입되어있어 읽기 어렵지 않고, 독일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읽기 편하고 재미있다.
이 책이 강조하는 것은 독일의 원조인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재해석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강력한 중앙집권제인 것과 달리, 자율적인 지역으로 나뉘어 분권화 기간이 길었던 독일의 역사가 하나의 단일한 서사로 해석될 수 없다. 이 부분은 독일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현재의 독일 국가 경계선을 훨씬 벗어났던 독일 언어와 문화 영역이 어떻게 이웃 나라들의 영역과 겹치며 상호 작용을 했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본문을 읽다 보면, 중학교 때 추상적으로만 감을 잡고 외웠던 '신성로마제국'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과거사 이해는 현재의 유럽에 대한 이해로 이어진다. 독일과 유럽연합의 관계를 통시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브렉시트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도 끄덕일 수 있다. 현재 코로나에 대한 Lockdown 정책에 대해 독일의 각 주지사들과 연방 정부의 협의가 얼마나 지난했을지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뮌헨의 바이에른 개선문 (좌) 뮌헨 시청앞 광장에서 (우) (C) 2020. 익명의 브레인 닥터 All rights reserved.
실속 있고 그 자체로 브랜드가 된 독일의 콘텐츠를 한데 모아 읽는 재미도 있다. 괴테, 루터의 종교개혁,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그림 형제의 이야기, 화가 뒤러, 바우하우스, 폭스바겐 비틀 등이 모두 독일의 정체성을 세우는 핵심 요소들이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통해 표준 독일어를 탄생시켰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라는 새로운 매체에 올라탈 수 있었던 배경에도 권력이 분산된 자율적인 분권 시스템이 큰 몫을 했다.
독일에는 유명한 숲(Wald)이 많다. 키가 큰 침엽수와 참나무가 무성하여 숲의 원시적인 광활함이 좋게 보이면서도, 조금만 어두워져도 하나같이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독일의 숲. 우리가 잘 아는 그림 형제의 <라푼젤>, <헨젤과 그레텔>, <백설공주> 등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배경이 '숲'으로, 독일에 막 정착한 이방인들에게는 인상적인 장소이다. 독일인의 숙명, 정체성과 연결된다는 이야기에 절로 끄덕인다.
독일의 숲과 공원 (C) 2020. 익명의 브레인 닥터 All rights reserved.
가장 궁금했던 것, 현재까지 가장 치명적인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나치의 제3제국과 관련한 독일인들의 자의식을 읽어낼 수 있다. 독일사를 읽다 보면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이뤄놓은 대단한 학문적 문화적 성과가 어떻게 나치로 이어졌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없다. 거의 모든 독일 가정이 나치의 가담자가 되었던 당시, 사람들은 쉽게 잊고 당연히 복종하고 집단적으로 순응했었다. 이런 트라우마를 덮어서 곪게 만들지 않고 과거의 민낯을 잊지 않기 위해 홀로코스트 추모비를 수도 베를린 중심에 세우기까지, 가식적인 역사의식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독일은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서유럽에서 유대인 인구가 가장 빠르게 늘고 있는 나라가 독일이라는 점이 명확히 증명하고 있다.
독일에 오면 많은 종류의 맥주를 생수처럼 사다 마시게 된다. 전 세계적인 맥주 축제인 옥토버페스트를 아직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매번 다른 맥주를 음미하며 독일인의 맥주 사랑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맥주와 소시지와 관련한 스토리를 읽고 난 뒤, 그들의 맛과 향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다. 적어도 하얀 소시지 뉘른베르크 부어스트를 먹으며 가격에 비해 크기가 작다며 불평하지는 않게 되며(당시 동양 향신료가 비쌌기 때문이란다), 바이에른 바이스부어스트(하얀 소시지)를 먹을 때 기름에 튀기지 않고 물에 삶아 프레첼 빵과 같이 먹는 게 자연스럽다.
마트나 길거리, 공원에서 마주치는 독일 사람들의 외양은 대개 수수하고 검소해 보인다. 사치하지 않고 실용성을 중요시하는 문화 뒤에 '프로이센'의 '철'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음도 알게 된다. 실용성을 중요시한다고 해서 촌스럽게 사는 것도 아니다.(물론 독일에 사는 미술 전공자 지인은 독일이 새로운 아트 트렌드를 좀처럼 소화하지 못한다고 불평하긴 했다.) 마이센 도자기, 금속 가공 기술, 현대 건축과 디자인의 원형인 바우하우스의 역사까지 읽으니, 독일 철학과 사회 역사, 미학을 모두 한데 엮어 공감할 수 있었다.
책의 분량이 많아 순서대로 읽기 지루하면 챕터 순서를 무작위로 골라서 읽었지만, 어느 부분을 읽어도 일관성 있게 읽히는 책이다. 그림과 조각, 지역 화폐, 포스터, 사진, 건축물 등의 다양한 재료와 역사 이야기를 가지고 서로 연결을 짓는 범주적 사고를 이끌어내는 장점이 있는 책이다. 독일을 직접 겪고 있는 분들이 흩어져있는 개인의 경험에 얽매이지 않고 융통성있게 살아가도록 도와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탄생한 새로운 독일의 관점에서 역사를 되돌아보는 프로젝트가 바탕이 된 책이라 서술의 톤이 긍정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다. 어떻게 보면 편파적일 수 있지만, 독일과 어떤 식으로든 인연을 맺거나 맺을 예정인 분들에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