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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ia Jan 03. 2023

과거와 미래가 만나다

하이든 첼로 콘체르토와 함께 한 저녁

어제는 하루 종일 글을 쓰고 아이들을 챙겼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세끼를 다 집에서 먹고 따뜻하게 지냈다.
그동안 도저히 글이 안 풀렸던 건 집중할 수 없는 환경 때문이라 생각해서

종강을 하면 어디론가 며칠 가서 원고 마무리를 하고 와야겠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학기 중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성적입력을 마무리하고 모든 학기를 끝내고 나니 갑자기 손이 움직여지기 시작한다.
어제 새 챕터를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재밌게 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코로나 전에 계약해놓고 이제야 제대로 쓰는, 출간되면 엉엉 울 것만 같은 책.
오래 기다려주신 편집장님 때문에라도 이번 겨울에는 꼭 완성을 해야 한다.

초등 고학년과 중학생들을 위한 상호문화적 콘텐츠가 잘 쓰여서
다문화사회 한국의 학생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오후 내내 글을 쓰다 머리가 아파 첼로를 잡았다.
2시간이 훌쩍 갔다.
이렇게 재미있게 연습을 한 건 올해가 처음이다.
전공할 때는 꾸역꾸역 의무감에 시간을 채웠는데, 이제는 시간 가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겨우 손을 놓는다.

과거를 후회하지 않는 편이지만 독일서 음대를 다니던 시절의 내 모습은 후회가 된다.

참 좋은 환경이었는데, 첼로와 싸우느라 시간을 많이 버렸다.
요즘에는 연습 중 첼로가 손에 붙는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다.

첼로를 사랑하던 우리 아빠 제자들과 내 친구들은 아마도 매일

이런 경험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나중에 만나면 물어봐야지.

1, 2월 잡힌 공연 때 할 곡들을 연습한 후에 Haydn Cello

 Concerto in C Major 악보를 꺼냈다.
1악장 앞부분은 자주 연습해 보았지만 전체를 읽은 건 참 오랜만이었다.

전 악장을 손이 다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손이 빨리 돌지도 않고 음정도 틀렸지만
어느 자리에 손이 가 있어야 하는지 몸이 아직 알고 있었다.

언젠가 애증의 이 곡을 무대에서 연주할 수 있을까?
3악장까지 왼손이 돌아가주려나.
오른손은 버텨줄까.
들어줄 관객은 계실까.
천천히 열심히 조심스레 연습해나가다
20년쯤 지난 어느 날 전곡을 연주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유물 같은 나의 악보 앞에는 1981년 한국에 온 첼리스트 János Starker의 친필 싸인이 적혀 있다. 
나를 첼리스트로 키우고 싶었던 아빠의 꿈을 담은 악보.
언젠가 조금이나마 이루어드릴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소망해 본다.


브런치를 시작할 때에는 음악을 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막연한 꿈을 꾸었었다.

놀랍게도 지난 2년 동안 어느새 많은 이들의 도움을 등에 업고

다시 포스터에 첼리스트로 이름을 올리는 연주자로의 삶이 시작되었다.

막연히 책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시간을 지나

어느새 풀리지 않는 원고로 씨름을 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과거와 미래가 만난 어제.

감사 밖에는 할 것이 없는 삶이라는 걸 다시 한번 생각한다.

연습하다 막히고, 글이 맘대로 써지지 않을 때 꼭 기억하자.

지금의 시간이 얼마나 기적같이 찾아와 준 것인지를.


오늘 저녁에도 첼로가 손에 쫘악 붙어주면 좋겠다.

글까지 잘 써지면 금상첨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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