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장애가 있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누군가가 나를 장애인으로 분류한다는 것에 분노를 느낀 이유가
'장애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스스로의 정의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 긴 긴 울음의 밤을 통해 깨달았다.
왜 나는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겠다고 들어간 단체 속에서 장애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지냈을까.
나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장애를 지니고 살아가는 분들과 동질성을 만들어 가면서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을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분노하기까지 했을까.
깊이 생각을 해보니 결국에는 장애인이라는 이미지에 대한 내 인식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장애를 지닌 분들과 함께 하고자 했던 내 마음속에는 '불쌍하다', '도와야 한다', '안쓰럽다' 등의 생각이 존재했기에,
내게 장애 등급을 물어오신 분의 질문 속에 스스로의 마음을 투영하여 받아들였던 것이다.
장애 몇 등급이에요? 의 물음이 순수한 의도였음에도 나는 그 질문 속에
"장애가 있는 Sonia는 참 불쌍하군요. 몇 등급이에요? 얼마만큼의 동정을 내게 받고 싶나요?"가 섞여 있다고 착각하며 분노한 것이었다.
결국 순수하지 못한 것은 그분이 아닌 나였다.
나의 분노 속에는 그간 내가 장애를 가진 분들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왔는가에 대한 부끄러운 성찰이 들어있었다.
그래, 나는 장애인이야.
분노로 시작한 울음은 인정의 몸부림으로 이어졌다.
한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두 눈이 다 보이는 것이 보편적인 상황에서 분류상 '장애'였고, 그것은 내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사실이었다.
내가 애써 장애인이 아니라고 부인해본들, 내 눈이 기적적으로 다시 보이게 되지 않는 이상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장애인으로 불리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보이지 않는 내 눈으로 인해 불쌍하다는 동정을 받고 싶지 않았고,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고, 안쓰럽다는 눈빛을 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더하여
장애인을 바라보는 인식 자체에서 자유롭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스스로 장애인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불쌍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장애인은 불쌍한 존재가 아니구나!
나의 분노는 내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에서 출발했다.
그 사건을 통해 장애인은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고, 내가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받고 싶은 것처럼 내가 만나온 한 분 한 분도 동일한 마음이었을 거라는 걸 생각하게 되었다.
아.. 어쩌면 섣부른 배려가 그분들을 아프게 했을 수도 있었겠구나..
스스로 장애를 가졌음에도 장애인이기 싫었던 나.
그런 나를 만들어낸 것은 나에게 습득되고 사회화된 장애인에 대한 고정관념이었다.
장애는 신체나 정신에 나타난 한 가지 특징이다. 손상이 일어난 곳은 부분이지 그 사람 전부가 아니다. 이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장애인이 가진 능력에 대해 넘겨짚는 실수를 하곤 한다.
이지선 공존의 지혜 | 장애인을 차별한 적이 정말 없나요 중 발췌*
그날 밤의 울음은 분노에서 시작하여 인정으로,
인정에서 깨달음으로 이어졌고,
더 이상 장애인 = 불쌍하다는 공식이 내게 성립하지 않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부르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아니, 오히려 내가 가진 장애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에서#3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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