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말들은 누군가의 가슴에 비수로 꽂히지만

두근대는 심장소리가 첼로 등판에서 들린다(1)

by Sonia


사랑이란 냉정과 열정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것은 아닌지

냉정한 듯 보이지만 그 안엔 열정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하고

열정으로 다가가는 순간에도 냉정이란 또 다른 감정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과거에는 첼로 전공자였고, 지금은 비전공자인 나는 둘 사이의 경계에서 부유하는 중이다.

첼로를 처음 시작한 건 6살 때쯤이었다. 아빠가 기타만큼 작은 첼로를 선물해주신 날, 소파에 기대 아빠처럼 활을 그어보았다. 거실에 깔려있던 카펫, 천정에 달려있던 불의 빛깔 같은 것이 뇌리에 남아있다.

장난감처럼 첼로를 가지고 놀던 시절을 지나 전공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건 아마도 직업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생각하게 된 나이 그 언저리쯤이지 싶다. 아니, 마음을 먹었다기보다 그냥 그렇게 첼리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시기라고 해야 할 듯하다.


오래도록 착각하며 살았다. 아빠처럼 첼로를 전공하면 언젠가 오스트리아나 독일로 유학을 다녀온 후 K나 S, 혹은 B로 시작하는 오케스트라에 들어가서 연주와 레슨을 하면서 살게 될 거라고. 고등학교 3학년 입시 때 원하던 대학에 줄줄이 낙방한 후 쫓기듯 유학을 가지 않았더라도,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아마 언젠가는 당연히 흘러가듯 유학길에 올랐을 것이었다. 운명이 되어버린 첼리스트로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첼로가 너무 싫었다. 친구들이 서로 팔짱을 끼고 학원에 갈 때 혼자 집에 와서 외롭게 연습을 해야 했다. 완벽을 추구했던 아빠는 실수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연습을 하는 게 아니라 종일 레슨을 받는 것 같은 삶이 꼭 감옥 같이 느껴졌다. 연주를 잘 하면 “와, 역시 첼리스트 000의 딸이구나!”하는 소리가 들리고 실수하면 “아니 첼리스트 000 딸이 왜 이래?”라는 말이 들릴 것 같았다. 왜 평생을 저 두 문장에 얽매인 채 살았을까. 온전히 나의 삶을 살아도 되었을 것을, 아빠의 삶 언저리에 나의 것을 걸쳐놓고 살았다. 그건 아빠가 원한 것도, 내게 그런 말을 스치듯 했던 사람들도 원한 것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어떤 말들은 입으로 나간 후 누군가의 마음에 비수로 꽂혀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사실 별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독일 유학 중 무대에서 손을 크게 다쳤다. 독일은 졸업 시험을 여러 번에 걸쳐 본다. 학부생이 된 후 4학기가 지나면 중간 졸업시험을 한 번 보고, 모든 학기를 다 마치면 두 번의 시험을 본다. 중간 시험에 두 번 낙방하면 학교를 더 다닐 수 없다. 너무나 중요했던 중간 졸업 시험을 보던 날, 무대에 홀로 앉아 조명을 받으며 관객과 교수님들 앞에서 피아노 반주를 따라 나의 시작점을 기다렸다. 파우어라는 작곡가가 만든 파워풀한 곡이었다. 실내악용으로 만들어진 것 같이 작은 소리만 내는 첼로로 독주를 위해 연습하던 내내 교수님은 첼로를 얼른 바꾸라 하셨다. 이 악기로 독주를 계속 하다가는 손을 다치고 말거라고. 악보를 읽어 내려가며 한 줄 한 줄 연주하는데 활 잡은 오른 손 느낌이 이상했다. 얼마 전부터 연습을 많이 하면 손이 굳는 것 같았는데, 하필 중요한 무대에서 손에 문제가 생겼다. 곡이 끝으로 달려갈수록 손은 점점 마비되어 갔다. 결국 주먹을 쥐고 보잉을 마무리해서 연주를 마쳐야만 했다. 독일 유학 마지막 공연이 되어버린 무대에서 다시 활을 온전히 잡을 수 없는 오른 손 부상을 입었다. 교수님의 말대로 첼로를 빨리 바꾸었다면 괜찮았을까? 아빠의 그늘 아래 있던 내 삶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가져왔었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까?


그토록 하기 싫던 첼로였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다친 후 꽤 오랜 시간 방황을 했다. 애증의 첼로를 더 이상 잡지 않아도 되는 것은 어느 정도의 행복감을 주었지만, 십여 년간 첼로 밖에 한 것이 없는 나로서는 앞으로 도대체 무얼 하며 살아야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음대를 졸업하고 나면 신학을 전공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두 개였던 교회가 서른 세 개가 되는 동안 이민 2세 아이들은 상처를 많이 받았다. 어제까지는 같은 교회를 다니던 아이들이 어른들의 싸움으로 같이 등을 돌려야 하는 현실이 슬펐다. 신학 공부가 너무나 하고 싶었다기보다는 사랑하는 2세 아이들과 영원히 함께 하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내가 신학을 공부해서 사역자가 된다면, 그래서 깨어지는 교회 속에서 버틴다면 아이들이 덜 아플 것 같았다. 아이들은 나를 한인 교포 2세로만 이루어진 모임의 회장으로 뽑을 만큼 믿어주었고, 사랑해주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 만나 한 번은 우리 집이나 문숙언니 집에서 밥을 먹고, 한 번은 예배를 드렸다.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다.


인간의 다짐이란 얼마나 약하디 약한 것인가. 2004년 몸이 너무 아파 휴학을 하고 잠시 귀국을 했는데 그 뒤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여전히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숙제처럼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 남아있다. 영원히 함께 살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지금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미안한 마음이다. 이미 그 아이들은 중년의 성인이 되어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부채감이 있는 상태에서 살아간다. 마음이 아플 때면 독일어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 그 때문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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