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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ia Feb 23. 2021

나의, 우리의 초록 집

경계에서 살며 경계를 사는 이들과 함께하다

    

14년 만에 독일로 가는 길

     

     작년 딱 이맘때 귀국 14년 만에 독일 땅을 다시 밟았다. 1997년부터 2004년, 독일에 나의 젊은 시절이 살아 있다. 몸이 너무 아파 잠시 휴학을 하고 나왔었는데, 그 뒤로 다시 돌아가기까지 14년이 걸렸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길이 없어 떠나기 전날 밤 쉽사리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너무 그리워서 티브이에 독일이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리고, 애써서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시간들을 지나 이제 마음껏 그리워할 수 있는 날이라는 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독일에 살 때도 그랬다. 방학이 되어 한국에 잠시 들어오기 전날 밤. 맘껏 그리워해도 좋은 그 시간이 행복했다.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해도 내일이면 한국 땅을 밟을 수 있는 유일한 날. 그때는 그렇게 한국이 그리웠는데, 이제는 독일을 같은 마음으로 그리워하고 있다.


Wien 시절 꼬맹이였던 나


     오스트리아 Wien에서 태어나 5살에 한국에 들어왔다가 고3을 마치고 다시 독일로 가서 청년기를 보낸 나의 삶은, 언제나 문 틈에 끼인 것만 같은 감정이 가득한 시간이었다.

     경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이, 부유하는 마음을 달래며 사는 하루하루. 독일에 있으면 한국이 그립고, 한국에 있으면 독일이 그리운.. 어디가 내 진정한 집인지 알 수 없이 사는 삶. 몸이 너무 아파서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할 새 없이 잠시 휴학을 하고 한국에 왔는데,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경계인이라고 할 수 없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며 사는 중에도 문득문득 가슴 시리게 그리운 날들이 찾아온다. 왠지 어딘가에 소중한 것을 두고 온 것 같은 마음이랄까.


자주 가던 피자집마저 그대로 있던 독일


     마음껏 그리워하다 도착한 독일은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스무 살부터 7년간 살았던 나의 제2의 고향. 잊은 줄 알고 살았던 모든 골목들과 길들을 온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도착한 지 3일째 되던 날, 머물던 숙소에서 S-Bahn을 타고 프랑크푸르트 시내로 나가, Römer광장에서부터 Main강을 따라 걸었다.


그리웠던 Römer광장

     30여분을 걸어 강 가에 있던 나의 초록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익숙했던 벽화들이 여전히 그대로 있고, 돌들과 벤치들이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나는 14년 만에 그곳에 있었는데, 몸은 바로 어제 걸었던 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누가 보면 그저 쭈욱 그곳에 살았던 양 걷고 있었다. 물론 휘둥그레 뜨고 있는 눈과 다물어지지 않는 입으로 인해 어제까지 살았던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이 그리울 때면 늘 걷던 Main강


     다리 몇 개를 지나 ‘우리 집으로 가려면 어느 계단을 올라야 하지?’라고 생각이 시작되자마자 이미 몸이 본능적으로 계단을 찾았고, 걸음에 이끌려 늘 다니던 길로 올라가니 저 골목 끝에 서 있는 ‘나의 초록 집’을 볼 수 있었다. 몸이 아파 잠시 휴학을 하고 다시 돌아올 거라 생각하며 떠났던 길. 영원히 나의 집일 것이라 생각하며 침대며 가구를 새로이 다 사놓았던 곳. 너무 반가워서 달려가는 동안 나는 분명 웃고 있었는데, 내 집 창문이 한눈에 들어오자마자 울음이 터졌다. 지금은 누가 살고 있을지 알 수 없는, 14년 전 떠났던 그 날 이후 더 이상 내 집이 아닌 집. 그래도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내 집인 그곳. 왜 우는지도 모른 채, 건물 벽을 쓰다듬으며, 이제는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이 붙어있는 초인종을 바라보며 계속 울었다.


내 초록집. 멀리서 보자마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릴 적 나는 귀가 예민하고 통각도 예민했다. 중학생 이상 되면 들리지 않는다는 모기 잡이 기계의  초음파 소리도 계속 귀에 들리고, 작은 상처에도 너무 아파 철철 울었다. 누군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를 하루 종일 곱씹으며 힘들어했던 시간. 어쩌면 나는 지금의 나를 엄마로 만나도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런 내게 어릴 적 살던 집은 내게 답답한 감옥 같았다. 부모가 되어보니 당시 엄마 아빠도 부모역할이 처음이셨고, 힘든 상황 속에서 각자의 최선을 다하신 것을 알지만.. 예민하고, 아프고, 작은 일에도 상처 받던 나에게는 쉽지 않은 삶이었다.  


     통금시간 5시, 내게는 너무 무섭던 아빠와 홀로 책을 읽거나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고 있던 엄마가 있던 집. 서울 아파트의 역사에 등장하는 동네의 오래된 회색 단층 그 아파트는 너무 단단하게 지어져 못질도 잘 되지 않았다. ‘살기 좋고 아늑한 분위기, 친근감이 생기는 집을 위한 가족’, ‘집의 본질이자 인간에게 안전과 편안함을 조성하는 불가분의 관계인 가족’이라는 문구와는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던 회색의 집.

  

독일 한인 2세 아이들이 늘 북적이던 우리의 초록 집


     그 집에 비해 독일에 있던 나의 초록 집은 늘 2세 아이들이 북적이는 따스한 공간이었다. 1960년대 말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에 오셨던, 외화벌이를 통해 우리나라를 일으켜 세우셨던 분들의 자랑스러운 자제들. 그 아이들은 늘 우리 집에 와서 울곤 했다.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왜 나는 엄마랑 사전을 펴 놓고 이야기를 해야 하냐고.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 돈을 열심히 벌던 부모님과 아이들은 언어와 문화의 괴리가 생기며 더 이상 ‘가족’으로의 따스한 대화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부모님과 언어는 같았으나 마음의 온도가 달라 늘 외로이 회색 집에서 혼자 울던 나와 한국을 살리느라, 가족을 살리느라 바빴던 부모님과 언어와 문화가 달라 외로이 울던 독일 교포 2세 아이들은 나의 초록 집을 공유하며 제2의 가족이 되어 갔었다. 아이들이 울며 찾아오면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초록 집 냉동실에는 싸구려 피자가 채워져 있었고, 약속 없이 올 수 있는 우리 집에서는 매일 따뜻한 이야기들이, 눈물의 속삭임들이 쌓여갔다.


      가족이 그리운 이들이 공동체 주택을 찾아가듯 2세 아이들이 찾아왔던 우리 집.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는 중년이 된 그들 역시 여전히 우리의 초록 집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날의 시간들이 쌓여, 우리가 가족이 되었던 시간들이 거름이 되어 각자의 자리에서 한국과 독일의 가교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주는 아이들이 얼마나 고마왔는지 모른다.


이젠, 남의 집. 하지만 여전히 나의 우리의 초록 집..


     14년 만에 다시 마주한 그 초록 집은 여전히 내게 가장 따스한 ‘나의 집’이었으나 들어가 볼 수도, 들여다볼 수도 없었다. 이제는 누가 살고 있을까? 그 사람에게 그 공간은 어떤 느낌으로 채워지고 있을까? 같은 건물, 같은 공간이지만 누가 누구와 사느냐에 따라, 누가 그 공간을 채우느냐에 따라 그 건물의 정체성은 달라질 것이다. 이제, 한국에서 새로운 초록 집을 세워가고 싶다. 파독 간호사, 광부 분들처럼 한국에 와 계신 분들의 자녀들과 함께. 경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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