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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 6차 후유증의 고통과 뇌 mri 촬영

그리고 삶을 견디는 기쁨에 대하여

by Sonia

헤르만 헤세의 에세이 <삶을 견디는 기쁨>에는 '힘든 시절에 벗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소울 메이트인 사샤가 데이지꽃 화분과 함께 준 선물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밤을 보낸 아침 작가의 문장 중


저녁이 따스하게 감싸주지 않는

힘겹고, 뜨겁기만 한 낮은 없다.

무자비하고 사납고 소란스러웠던 날도

어머니 같은 밤이 감싸 안아주리라


라는 구절에 위로를 받았다.

고통이 있긴 했으나 고통만 있지는 않았기에 눈을 뜰 수 있었던 아침이었다.


요즘에는 거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이불을 정리하거나, 책상을 닦는다거나, 김치찌개를 끓인다거나(이건 거의 초인적인 힘이 필요하다) 하는, 아주 조금 힘을 쓰는 일을 하고 나면 바로 누워야만 하는 체력의 소유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루에 3-4가지의 일정을 파주, 양평, 천안, 홍천 할 것 없이 다녔던 나로서는 무용한 인간이 된 것 같아 괴롭다.

내가 지금 이런 상태라는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무용이라니! 생과 전투하고 있는데 이것보다 크고 귀한 일이 어딨어?"라고 말해주었다.

나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낸 친구, 화상경험자로 <꽤 괜찮은 해피엔딩>, <지선아 사랑해> 등을 써낸 내 친구의 이야기이기에 위로가 되었지만 그래도 내가 무용한 것 같은 마음을 한 순간에 버리긴 어려웠다.


왜 나는 '무언가를 제대로 하는 상태'의 나만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어있을까.

그저 침대 위에 누워서 고통 중에 있거나, 조금 나아져서 책을 읽는 나 역시 충분히 괜찮을 텐데.

누군가 유방암 3기 6차 항암 끝에 책을 읽고 있다고 하면 도시락을 싸들고 말리면서 그냥 누워서 쉬라고 할 것이건만, 객관적으로, 이성적으로 나 스스로를 보기가 너무나 어렵다.

내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은 나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외로움 중의 일부분이다.


하루종일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에 시달린다. 특히 손 끝과 발 끝이 말로 할 수 없이 아프다.

겨우 일어나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지금도 손톱이 빠질 것만 같이 아프다.

실제로 왼 손 손가락은 퉁퉁 부었고, 중지와 검지의 손톱이 들리고 있다.

몸은 화학약품 실은 배를 타고 입에 왁스를 물고 파도와 싸우는 느낌이 계속된다.

뭘 먹어도 느끼하고, 왜곡된 맛이 혀 끝을 감돈다.


6차 항암 후 받은 종합 검사 결과는 그렇게 좋지는 않다.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종양 크기가 작아지긴 했지만 3차 항암 후 했던 검사 결과보다는 나빠졌다.

작아졌던 종양이 다시 커진 것이다.

독한 항암제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양이 다시 커졌다니.

게다가 세상이 빙빙 돌고 누워있는 침대가 360도 돌아가는 느낌이라는 말씀을 드리니 뇌전이 가능성 여부를 알아봐야 한다며 뇌 mri까지 찍은 상태다.

3월에는 11시간의 수술, 아마도 14차례 캐싸일라 후항암(기대했던 것보다 독한 약과 더 긴 치료기간), 방사선 치료들이 기다린다.

수술을 하는 날 수술 중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는 무책임한 바람까지 들었던 이번 주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무자비하고 사나운 시간들이다.

삶을 견딜 수 있는 기쁨이 필요한 시간.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무용한 시간을 견디고 나를 인정해주어야 하는 시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야 하는 시간.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지금을 사는, 앞으로를 살아야 할 나에게 가장 필요한 작업인지도 모른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전능자, 가장 선하신 그분이 선물하신 이해할 수 없지만 가장 좋은 시간.

헤르만 헤세를 힘입어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삶을 견디는 기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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