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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함께 걷고 싶은 계절

단짝 친구와 함께 유방암 환자가 되었다 #2

by Sonia

어디든 붙어 다니던 우리는 나의 유학 초반 시절 유럽을 함께 걸었다.

잠시 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어갔다가 같이 독일행 비행기를 타던 날 우리는 같은 브랜드에서 산 색깔만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독일의 중세 마을 밀텐베르크, 나무다리가 인상적이었던 스위스의 사랑스러운 도시 루체른, 뜨거웠던 이태리 로마, 나의 고향 빈.

서로 좋은 침대에서 자라고, 네가 더 맛있는 걸 많이 먹으라고, 네가 더 보고 싶은 걸 보자고 우리는 싸워댔다. 너무 많이 배려를 하다 마음이 토라지는 시간을 보냈던 건 우리가 순수하고 어렸기 때문이겠지.


우리 둘 다 완치가 된다면, 아니 완치 판정을 받기 전에라도 우리의 체력이 허락한다면 다시 유럽의 그 거리들을 걸어보고 싶다.

밀텐베르크 우물가 앞에서 사진을 찍다가 사랑스러운 소품이 가득한 길거리 상점에서 선물을 몇 개 고르고, 노천 식당에서 치즈와 햄을 끼운 샌드위치를 먹고 싶다.

루체른에 다시 가서 에메랄드빛 호수 위 쏟아지는 햇살을 보았던 배를 다시 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빨갛고 귀여운 기차를 타고 리기산을 올라야지. 두꺼운 옷을 가져가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또다시 만년설 위에서 반팔을 입고 덜덜 떨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번에는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하던, 재즈가 흐르던 카페에도 들어가야겠다. 배낭여행하던 학생 때보다는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여행 경비가 조금 더 많아졌을 테니까.

로마에 가면 중앙역 떼르미니 안에 있던 피자가게에 한 번 더 가고 싶다. 넓적한 피자에 치즈랑 살라미만 있어도 정말 맛이 있었지. 38도가 넘는 불볕더위에 슬리퍼를 신고 아픈 다리를 끌며 걸었던 네게 이번에는 푹신한 운동화를 먼저 사줘야겠다.

반나절쯤은 서로 가보고 싶은 곳에 각자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함께 하는 여행이라도 보고 싶은 게 다르다면 잠시 각자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테니.

뜨레비 분수 앞 골목에 있던 젤라토 집이 아직 있다면 스트라치아텔라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고 싶다. 돈을 아끼겠다고 맥도널드 세트 메뉴 하나를 둘이 나눠먹던 아침. 서로 더 먹으라고 싸우지 말고 이번에는 각자 먹고 싶은 걸 꼭 먹을 수 있기를.

빈에 가면 자허 토르테 집에 갔으면 좋겠다. 20년 전 그때엔 너무 비싸서 갈 수 없었던 곳. 디카페인 커피 한 잔씩 시켜서 진한 초콜릿 케이크를 한 입씩만이라도 먹어볼 수 있기를.

유럽에서 따사로운 햇빛을 만나려면 계절은 초여름이 좋겠다. 이태리에서 조금 더울 수 있겠지만 땀 흘리며 걷는 것도 추억이 되겠지.

밤기차에서 받은 빵에 잼을 발라 나눠먹던 순간조차 너무나 그립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잘 몰랐던 것도 같다. 너무 배려하느라 서로 괴로워한 걸 보면.

차라리 조금씩 이기적이었다면 우리의 유럽여행이 조금 더 웃음 가득한 시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함께 그때의 루트를 따라 여행을 해보고 싶다.

이번에는 서로 하고 싶은 걸 이야기하고, 먹고 싶은 걸 이야기하고, 가고 싶은 곳을 이야기하면서 조금은 덜 배려하면 어떨까.

우리 둘 다 많이 아파보았고, 하루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무엇이든 당연한 건 없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충분히 '덜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볼 수 있게 되었지 싶다.


글을 쓰는 내내 리기봉에 가는 배에서 함께 보았던 파란 하늘과 쏟아지던 햇살이 떠오른다.

루체른의 저녁, 선선한 바람이 볼에 스치는 동안 멋지게 들리던 재즈도.

언젠가 꼭 다시 걷고 싶은 초여름의 유럽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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