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기록할만한 하루, 기록한 하루 되셨나요?
저는 일-화가 가장 힘든 기간이에요. 하루에 5-6시간의 강의가 있거든요.
녹초가 되어 잠시 기대 있다가 다시 일어나 마음을 가다듬고 오늘의 기록을 위해 책상에 앉았습니다.
오늘은 하샤 님이 마음의 어지러움, 삶에 대한 원망 등으로 지옥같이 느껴지는 순간에 대한 질문을 보내왔어요.
'다름'이 만들어내는 괴로움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요? 한 번 시작해볼게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지옥'은 존재합니다. 사람이나 상황으로 인해 마음이 어지러워질 때, 그래서 모든 것이 원망스러워질 때 우리가 있는 곳은 순식간에 지옥이 되어버리고 말지요. 누구에게나 이런 지옥을 경험하는 순간이 있을 겁니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이 순간에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똑같은 상황을 겪더라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은 너무 다릅니다. 생김새가 다른 만큼 생각하는 것에도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상황에 반응하고 대처하는 자세 또한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별'하나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며칠 만에 훌훌 털어버릴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몇 년이 지나도록 괴로움을 놓아버리지 못합니다. 저마다 치유되는 시간도 다르니까요.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각자의 시간과 속도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서로가 주는 상처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고, 각자의 속도와 생각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답니다.
세바시 인생 질문 1부 나는 누구인가 | 105페이지
시간과 속도의 차이로 인한 갈등의 경험:-
독일에서 유학을 할 때, 학장님과 면담을 할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약속 시간을 오전 9시 56분으로 알려주셨답니다. 9시 55분도 아닌 56분이라니요! 도대체 무슨 시간 약속을 이렇게 정할 수가 있나 정말 황당했어요.
그런데, 제가 중앙역에서 학교까지 가는 전차의 시간표를 보니 학교 정문 앞에 9시 52분에 도착을 하더라고요. 정문에서 학장님 방까지 걸리는 시간은 느릿느릿 걸어도 2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기에 56분에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독일 기차나 버스도 연착이 꽤나 많이 된다고 들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놀라우리만치 정확하게 시간표에 적힌 시간에 모든 교통수단이 도착을 했어요. 버스, 기차, 전철, 전차할 것 없이 모든 곳에 시간표가 붙어 있는 것은 물론 그 시간표대로 도착하고 떠나는 것이 너무 신기했지요.
사람마다 시간, 속도에 대한 생각의 기준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파를 적당~히 송송 썰어서 한 움큼 넣고, 간을 슴슴~하게.. 등의 표현을 하는 고맥락 사회에서는 '시간'에 대한 개념 역시 고 맥락적인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9시 반 '쯤'이라고 할 때 어느 정도의 범위가 '쯤'에 속할 수 있을까요? 9시 15분? 20분? 40분?
저 역시 우리 9시 반'쯤' 볼까?라고 고 맥락적 약속을 정하는 한국에서 살다가 9시 5'6'분에 만나자고 하는 독일에 살다 보니 초반에는 쉽지 않은 경험들을 했어요.
타인의 생각이나 가치관에 공감하지 못하여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경험이 있나요? 어떤 내용이었나요?
뭉뚱그려 이야기하거나 돌려 말하기를 선호하는 사회에 살다가 직설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는 사회로 유학을 가서 보니 그들의 대화 방식이나 사고방식에 공감이 되지 않아서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 학교 오케스트라에 있을 때, 첼로 파트 연습을 하는 중에 수석을 맡은 친구가 뒤를 돌아서 바로바로 지적을 하는 모습에 너무 상처를 받았었어요. 56분만큼이나 단호하고 정확한 그 아이의 지적! 나를 싫어하나? 나를 무시하나? 동양인이라고 그러는 건가? 생각은 멀리멀리 깊이깊이..
싶어서 상처를 받았는데 알고 보니 첼로 파트 전체를 맡아 이끄는 수석 역할을 정확히 잘하기 위한 그 아이의 책임감의 표현 방식임을 알게 되었죠. 알게 된 후엔 이미 저는 다른 전공으로..
또 이와는 반대로 일본에 갔을 때 너무너무너무너무 돌려 말하는 바람에 속내를 도대체 알 수가 없어서 너무 힘들었던 경험도 있어요. 결국 반나절이 걸려서야 처음 말한 대로 결정해서 일을 진행했었답니다.
후에 일본에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야 그날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두 나라의 보편 문화와 각자의 표현 방식을 미리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다면 필요 없는 오해와 감정 소모 없이 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서로의 생각 차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보았나요?
저는 '다문화/상호 문화'라는 것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한국은 2028년이면 10% 이상의 이주민들이 거주하게 된다고 해요. 앞으로 7년 정도 남은 시간 동안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상생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연구하고, 연구한 것들을 나누면서 그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 제가 하고 싶은 역할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실내에서는 신발을 벗지만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고 생활하는 문화권의 사람들이 있지요. 어렸을 적 미드 속 주인공 남자아이가 농구화를 신고 침대에 뛰어 올라가 팝콘을 먹는 것을 보고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과연 그 아이는 지저분한 아이였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일까요?
영화가 아니라 실제로 누군가 나의 방에 와서 그런 행동을 했다면 당시의 저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상호문화철학의 개념 중에는 '차이에의 긍정적 접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G. Ferreol, G, Jucqois이라는 학자들이 주장한 개념인데, 서로 다르다는 것은 서로를 불편하게 하는 것가 아니라 서로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비단 타문화권 사람들과 뿐 아니라, 같은 엄마에게서 태어나 같은 교육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형제, 자매들 사이에는 생각의 차이, 기준의 차이가 있지요.
특히 시간 개념의 차이, 표현 정도의 차이 등 본인이 살아오며 사회화된 생각과 행동의 틀이 있기 때문에 그 틀 밖에 있는 사람, 혹은 그 틀을 깨려는 사람을 만나면 어려움을 느낍니다. 각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작동하고 있고, 그것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대화를 하지 않으면 나를 불편하게 할 대상, 더 나아가 나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다름'이라는 것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을 때 분명 '장벽'처럼 느껴질 만큼 어려움을 주지만,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장점을 존중하여 각자의 역할을 할 때 서로를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각자 서로 모르는 분야를 알아갈 수 있는 세상이 더 열리는 거니까요!
나의 기준만을 내세우며 '실내에서 신발을 신는 것은 더러운 것이고 벗는 것만 청결하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실내에서 신발을 신는 문화권의 사람들은 '틀린' 삶을 사는 것이 되겠지만 그들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인정해 준다면 실내는 신발을 신을 수도 있고 벗을 수도 있는 곳으로 변화되고, 서로가 함께 살기 위한 기준을 새로이 만들기 위한 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위에 링크해 둔 동영상의 미국인처럼 자신의 선택, 청결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로 다시는 실내에서 신발을 신고 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지요. 반대로, 독일에 살고 있는 제 지인은 원래 발이 많이 찼는데,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을 수 있는 것이 너무 좋다고 해요. 계속 신발을 신고 살게 되어서 이제는 벗는 것이 어색하다고 말하는 한국인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실내에서는 이래야만 한다'는 생각을 떠나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이 새로이 생겼다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상호 문화연구를 하게 된 후 가장 크게 변화된 부분은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졌거나,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에 대해 '내 기준의 색안경'을 끼고 보면서 바로 판단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와 다른 생각을 하게 된 이유, 배경, 원인들에 대해 충분히 대화해보고,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사고의 여유, 생각의 여유가 생기고 나니 답답함, 분노, 조급함 등이 많이 사라진 것을 느껴요.
그 결과는 어떠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나요?
위와 같은 이유로 저는 나와 다른 생각, 가치관, 삶의 태도를 가진 이들을 바로 판단하려는 마음을 멈추고 대화를 하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그것이 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나를 위한 길이더라고요.
나와 다른 기준으로 살아가는 이들에 대해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하려는 태도를 갖고 살아가게 된 후에는 지옥 같은 감정보다는 안정감이 더 많이 느껴집니다. 내 기준,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마음을 기본으로 내 뜻을 관철해야만 한다는 생각, 내 기준이 옳다는 생각, 내가 가진 틀에 다른 이들을 끼워 넣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니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분노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9시 30분'쯤'에 익숙하던 한국의 삶에서 9시 5'6'분에 익숙해진 독일의 생활 이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9시 30분'쯤'의 시간을 사는 지금, 저의 시간의 기준은 바뀌어 있습니다.
나의 시간의 기준이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모든 상황에서의 완벽한 척도가 아니라 각자의 상황에 달라질 수 있음을 인지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9시 30분쯤 만나!라고 하는 사람을 9시 10분부터 9시 50분까지의 범위 속에서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9시 5'6'분에 만나!라고 하는 사람의 시간에 맞출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게 된 후에는 이전보다 더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 다양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협업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전 같았으면 함께 협업은커녕 "왜 저래",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네!" 등의 생각으로 괴로워만 했을 텐데, 각자의 상황과 그 사람 자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게 되니 다양한 일들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곤 합니다.
나와 너무나 다른 생각을 하고, 기준을 가진 사람은 내가 못하는 분야를 살아가고 있더라고요.
모든 이들의 귀함을 인정하고, 내 기준이 틀릴 수 있음을 기억하는 것.
서로 상생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가는 것, 차이에 긍정적으로 접근해 보는 것.
나의 고정관념의 기준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보편문화를 이해해보려는 노력, 모두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에 대한 의견 개진과 각자의 경계 속에서 어떻게 상생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려는 노력.
다문화화 되어가는 한국뿐 아니라 매일 치열하게 타인과 부딪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르기에 괴로울 수 있지만, 다르기에 더 넓은 생각을 할 수 있고, 함께 머리를 맞댈 때 더 창의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상호문화적 역량 | UNESCO guidelines on intercultural education]
각 사람의 존귀함을 인정한다.
자기 자신을 알고 자기 고유의 문화를 알아본다.
차이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가진다.
차이를 받아들인다.
자신의 판단을 잠정적으로 유보한다.
자기 자신을 분석하고 비판한다. (탈중심)
협상과 합의를 위해 노력한다.
[주제와 관련된 세바시 강연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