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하고 싶다.
한국인의 자살률은 OECD 평균의 두 배가량 높다. 통계를 보면 10대를 제외한 나머지 연령대에서 10만 명당 평균 30명 특히 70대 이상에서는 약 41명 80대 이상은 61명 정도의 사망률을 자랑한다.
여기 그 통계의 숫자 중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내가 있다. 내가 하루 중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우울해'와 '자살하고 싶다'이다. 청산가리만 손에 넣었으면 금방 그 길을 갔을 텐데. 그 길을 가지 못하는 나 스스로의 비겁함에 화가 난다.
중세시대에는 신이 주신 목숨을 나 스스로 처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범죄였기 때문에 자살자들은 죽고 난 다음에도 다시 교수형에 처해지는 등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그것이 17세기가 되면서 자살을 범죄로 취급하는 기독교 윤리가 옳은 것인가 논의가 시작된다. 존 던은 자살론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이때껏 신이 주신 목숨을 처분할 권리는 아무도 없다는 기독교 논리에 정면적으로 반박한다. 예수 자신이 "내 영혼을 없앨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것을 버릴 권능은 내게 있느니라"라고 말하며 십자가에 스스로 죽기를 선택했는데 누가 자살을 막을 수 있으랴? 덩달아 이 시대에 셰익스피어 등 극작가들이 자살에 대한 새로운 영웅적인 면들을 강조하면서 자살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 생겨났다.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에 대한 많은 토론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왜 자살을 선택하는 것일까? 나는 왜 자살하고 싶을까? 보통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우울증 같은 정신의학적 원인이 먼저다. 그 외의 다른 원인으로는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사람, 가족이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등 사회와의 관계가 연약하다면 자살하기 쉽다고 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할까? 그럼 부유하고 친구가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 걸까?
자살에 관해서 읽은 글 중 가장 내 마음을 흔들었던 것은 영국의 에드먼스 스펜서라는 시인이 쓴 서사시 '페어리 여왕'이라는 글에 나오는 죽음을 상징하는 레드크로스라는 악의 화신이 하는 말이었다.
만약 그 길에 약간의 고통이 뒤따른다고
허약한 육체가 그 격정의 파도를 두려워한다면 어찌할 텐가
짧은 고통이 긴 평온을 불러오고
조용한 무덤에서 영혼이 잠들 수 있다면
짧은 고통은 참을 만하지 않은가?
고생이 끝난 뒤의 잠, 폭풍우 치는 바다를 항해한 뒤 닿은 항구.
삶 이후 죽음은 전쟁 이후 찾아온 안락과 같이 전쟁이 끝난 뒤의 평온, 삶 후의 죽음은 큰 기쁨을 안겨준다.
삶 후의 죽음은 전쟁 이후 찾아온 안락과 같은. 자살을 원하는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자살을 원하는 사람은 각기의 마음의 지옥을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로도 말도 통하지 않는 지옥. 말 그대로 전쟁이고 그 이후의 안락함을 원하는 것이다.
나는 죽고 싶다고 생각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고양이나 가족을 생각하라고 말을 많이 들었는데 가족이 내 삶의 위로가 된다면 내가 자살을 하겠다고 생각을 하겠나?라는 생각을 한다. 이 지옥은 나만의 것이고 나의 영혼이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준다. 짧은 고통 뒤에 무덤에서 잠들 수 있다면 참을만하지 않냐는 말은 매우 유혹적이다. 자기 자신을 파괴한 선택을 한 사람은 어떻게 보면 용기 있는 사람들 같다. 나는 그 유혹을 언제나 느끼지만 그 선택을 하지 못해 노예와 같은 내 삶을 질질 끌고 있다. 지금의 내 삶은 내가 주인인가? 아니, 이 삶은 내가 주인인 삶은 아니다. 그냥 죽지 못해 사는 것이다. 내 삶은 어떠한 즐거움이 없기에 잃을 것이 없다.
그나마 감정적이 아닌 냉정하게 생각할 정신머리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은 통계로 봤을 때 이 아슬아슬한 유혹에 빠져있는 한국 사람들이 나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각자의 이유로 한국 사람들은 목숨을 끊는다. 도대체 무슨 이유였을까? 그들의 마음의 지옥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누가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을까 아니면 나처럼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을까? 우리는 유명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우울증이 심했나 보다 안타깝다. 좀 더 살아보지라고 생각은 할지언정 그 사람 마음속에 어떤 지옥이 있는지 생각해보지는 않는 것 같다. 그 사람이 그 지옥을 떠나 편해지고 싶었다면 아무리 내가 그 사람이 살아주길 바란다고 해서 그게 정말 옳은 일일까? 그런 생각이 든다. 모든 사람들의 자살 하나하나가 그냥 우울증과 사회적 유리라는 말 만으로 정리가 된다고 믿지 않는다. 30명의 자살자가 있다면 30개의 각기 다른 지옥이 있었을거라 믿는다.
물론 죽음을 선택했다고 해서 죽는 것도 쉽지 않다. 나는 친한 친구 중 하나가 자살시도를 해서 살아남은 경험이 있다. 문제는 그 친구는 아주 많은 수술과 후유증을 가지고 두 번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는 점이다. 죽는 것도 한 번에, 깔끔하게 죽어야 하는 것이다. 괜히 어설프게 다른 사람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면. 하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 나는 내 질긴 목숨을 조금이라도 유지할 생각이 있다는 의미일까?
다들 살아있음을 찬양하지만 살아 있는 게 죽는 것보다 더 나쁜 선택 같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