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합창이 싫은 이유
밤에 쇼스타코비치 10번을 듣다가 갑자기 투란도트가 듣고 싶어 졌다. 정확히는 모두가 아는 아무도 잠들지 마라나 주인님 들어주세요 등이 아니라 달의 노래라는 합창곡이 듣고 싶었다.
평생 시장에서 장사만 하신 외할머니 아래서 어디서 그런 교양을 습득했는지 엄마는 영어도 능통하고 신문물에 밝은 모던걸이었다. 그리고 그 모던걸은 내 어렸을 때 집에 온갖 독특한 음악이나 영상을 틀어두곤 했는데 덕분에 초등학교 때부터 CSI나 스타트렉, 퀸을 마스터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자기 전에 꼭 클래식을 틀고 - 잠들 때까지 듣고 자는 습관이었다.
집이 넉넉하지 않아서 테이프는 많지 않았다. 같은 테이프를 몇 번이나 돌려 들었는데 엄마의 최애는 클래식 컴플리케이션 테이프였다. 그 테이프의 한 노래가 나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B면 첫 번째 곡. 유령을 부르는 소리가 나던 곡. 그 곡이 나오기 전까지 잠드는 게 나의 큰 과제였다. 그 곡을 들을 때마다 유령이 나올 것 같아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다. 잠들면 큰 일을 해낸 것이고 잠들지 못하면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만 했다. 테이프에 쓰여있었던 투란도트라는 단어가 기억에 남은 채로 어른이 되었다.
나이가 들고 갑자기 그 곡의 정체가 궁금하여 그 곡을 찾기 위해서 인터넷 서칭을 했다. 그 덕에 그 곡의 제목이 달의 노래 또는 달의 합창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투란도트의 수수께끼를 맞히지 못한 페르시아 왕자의 사형 전날 북경 시민들이 사형을 기다리며 부르는 노래라는 것도. 그래서 그렇게 으스스했던 것이다. 가사는 몰라도 감각은 전해진다. 어린 나는 분명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어제 또 오랜만에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 1악장에서 그것이 생각났다. 사실 쇼스타코비치 10번은 쇼스타코비치가 9번 교향곡을 당의 의도와 맞지 않게 씀으로써 스탈린의 눈 밖에 나 목숨의 위기를 느끼던 시기에 쓴 - 그리고 스탈린의 서거 후에 발표된 - 아직까지도 논쟁의 여지가 많은 교향곡이다. 그래서 같은 죽음을 코드로 갖고 있는 달의 합창을 생각했을까? 아니면 듣고 있던 시간이 늦은 새벽이라 그랬을까? 잘 모르겠다.
부랴부랴 다음날 단골 레코드 가게로 가서 투란도트 시디를 사 재생해 봤다. 부클렛에는 엄청나게 많은 이탈리아어와 영어의 향연이 이어졌다. 짧은 지식으로 달이라는 단어를 찾기 위해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뒤쪽에 있는 넘버일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앞쪽에 있는 넘버였다.
어릴때 조그마한 라디오에서 들리는 소리와 다른 커다란 스피커에서 들리는 거대한 볼륨과 다채로운 소리 공간감이 나를 압도했다. 이탈리아 작곡가가 만들어낸 서양의 악기의 중국의 소리도 이제는 선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다. 물론 그 귀신 부르는 듯한 메조의 소리와 피리소리는 여전했다. 하지만 소리에서 오는 감동이 어릴 때와는 어마어마했다.
아. 나는 정말로 어른이 되었구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저 음악이 오지 않기를 빌던 작은 라디오 앞에 있던 소녀가 커다란 스피커 앞에서 음악을 즐기는 어른이 되었구나. 웅크리고 부모라는 불안한 손을 잡고 사랑받고 싶어서 외로워서 견딜 수 없던 나는 여전히 불안하지만 또 스스로의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어른이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거대한 감동이 들었다.
이 감동은 분명 나만이 알 수 있는 감동일 것이고 또 직접 투란도트를 보고 그 곡을 들어서는 다른 감동일 것이다. 글쎄... 아직 투란도트를 직관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떨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직관의 감동은 오디오가 나에게 준 감동만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달의 합창 앞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어린 소녀는 작은 라디오 앞에 있는 소녀였으니까.
모던걸이었던 여사님이 나에게 그 클래식 테이프를 틀어줬을 때는 이런 영향을 기대하고 틀어준 것은 아니겠지만 평생에 몇 없는 이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대해서 무척 감사하다. 무척이나 깨인 분이시기도 하고 지혜로운 분이시다. 어떤 어른이 되길 기대하면서 그런 독특한 취향들을 같이 어린 나와 공유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디스코와 클래식과 스타트렉을 아는 어른으로 컸다. 뭐. 그럭저럭 좋은 어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