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음악과 단골 레코드가게

저 인간은 찐 러친자다.

by 지한


자칭 소련음악 마니아인 나는 소련음악으로 클래식에 빠졌기 때문에 소련음악을 좋아한다. 소련 음악으로 시작된 근대 러시아 음악과 소련 음악에 대한 관심은 나의 음악 생활에 가장 큰 축이다. 러시아 음악은 뭐랄까. 야 쫄지마 존버해.라고 말하는 느낌이 있어서 무척이나 좋아한다. 비관적이지 않다. 자기 연민적이지 않다. 요란하지 않다. 그냥 담담하게 불행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간다. 그런 면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맨 처음에 수줍게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있나요...라고 묻던 나를 보고 음악 좋아하시나 봐요라고 물어보시길래 아 소련음악 좋아해요.. 옛날이면 잡혀가지 않았을까요?라고 하는 말에 웃으시던 단골 레코드 지기 두 분은 매주 와서 러시아 음악판만 쓸어가니 이 사람이 진짜 소련음악을 좋아하는. 말 그대로 러친자.. 러시아 음악에 미친 자라는 생각을 하신 것 같다. 오늘은 나에게 월간지에 러시아 음악에 대한 좋은 글이 실려서요라고 무크지를 건네주셨다.


그 무크지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자작나무란 신성함을 나타낸다고 한다. 차가운 죽음의 추위를 견디고 생명을 되돌리는 재생의 나무인 것이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러시아의 강한 정신은 자작나무에서도 자작나무를 모티브로 한 민요에서도 자작나무를 모티브로 한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 4악장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자작나무는 꿈결 같은 고요 속에, 금빛 불꽃 속에 서있다. 새로운 은빛을 나뭇가지에 뿌린 채로.(서울시립교향악단 정기 간행지 23.7월 -러시아와 자작나무)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투란도트 듣고!

다행히 있었다. 무크지에 나왔던 교향곡 4번. 심지어 마리스 얀손스의 지휘. 얼마 전에 차이콥스키 교향곡 추천을 여쭸을 때 이 앨범이 좋다고 추천해 주셔서 샀는데 여기서 빛을 발휘하는구나! 아 먼 강남까지 나갈 일 없어서 다행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들어도 1악장 시작부터 화자가 고뇌에 가득하다는 것만은 알겠다. 바이올린의 흐름, 호른이 그 느낌을 강조한다. 솔직히 이 차이콥스키 특유의 비련의 주인공 같은 느낌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느낌은 아니다 (그래서 근대 러시아 음악보다 소련음악을 더 좋아하나 보다.) 그래도 듣기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다.



드디어 그 문제의 자작나무 악장이다. 미친듯한 폭풍 속에서 조용하게 흘러나오는 자작나무 민요. 그 선율이 점점 하나의 헤게모니가 되어 운명과 대립하는 듯한 강하고 찢어지는 듯한 금관악기 소리가 나더니 어디 한대 얻어맞은 듯이 잠잠해진다. 하지만 금방 또 자작나무민요는 돌아온다.

그렇다 정말로 자작나무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슬픔을 이기는 강인한 생명력의 인간을 상징하는 무엇과 일맥상통한 면이 있는 것이다.



음악의 좋은 점은 약간의 인내심과 노력만 있다면 알면 알수록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과 언제든지 좋은 사람들이 나를 도와준다는 점이다. 어떠한 지식에 고점으로 올라가도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나에게 새로운 지식을 알려주는 사람은 언제나 필요하다. 단골 레코드 가게의 두 분은 그냥 지나가는 러시아 음악 마니아라고 생각하셨겠지만.. 러시아 음악 마니아는 그 덕에 새로운 러시아 음악 지식과 함께 음반에 대해서 자세하게 듣는 경험을 하게 되고 지친 마음에 심적인 위로를 얻게 되었다.



아, 자작나무처럼 강하고 열심히.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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