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사람이 만드는 감각.
남편이 말하는 데로 비싼 취향은 거의 다 갖고 있는 나는 요 몇 년간 만년필을 모으고 길들이는 재미에 빠져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귀신같이 노린 몽블랑의 상술의 넘어가 아서 코난 도일의 펜을 득펜한 이후로 쭉 나의 만년필 길들이기는 계속되고 있다.
사각사각. 그 소리로 대표되는 만년필은 다른 펜과는 다르게 펜이 돌아가지 않고 똑바르게 촉을 대야만 잉크가 흘러 나는 재미가 있으며 무엇보다 펜 촉이 종이에 걸리는 감각을 나는 무척 좋아한다. 모두가 애플 펜슬을 좋아할 때 나는 유난히 아이패드에 적응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애플 펜슬이 종이에 걸리는 감각을 아무리 무슨 짓을 해도 재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패드는 당근으로 가고 나는 정 반대로 만년필의 세계로 발을 담갔다.
내 주변에는 드물지만 커뮤니티를 보면 펜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각자의 사연 있는 만년필들이 만년필 수리점에 모이는 이야기를 보면 그래도 이런 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구나. 인류가 생긴 이래로 무엇인가를 남기려는 시도는 계속되었고 그 시도가 계속 이어지는 한 펜은 영원히 같은 자리를 차지하겠구나.라는 생각에 조금은 안심되었다.
만년필의 나라라고 하면 일본을 빼놓을 순 없다. 파커로 대표되는 미국. 몽블랑으로 대표되는 독일 등 우리나라에서는 서구권의 만년필이 유명하지만 파일롯트와 플래티넘 등 섬세하고 단단한 만년필들을 오랜 시간 일본도 만들어왔다. 그리고 (인구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직까지 만년필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제법 큰 중고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긴자를 꼼꼼히 돌아다니면서 내가 좋아하는 펜들을 찾아본다. 가끔은 큰 부티크에서 한정판 펜을 찾을 때도 있고 문구 체인점의 만년필 코너에서 찾던 펜은 아니지만 탐나는 펜을 발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의 만년필 시장에서 제일 부러운 것은 만년필을 '명품'이 아닌 펜 그 자체로 대하는 태도이다. 한국에서 몽블랑이란 아주 비싸고 장사 속이 좋은 만년필. 그러니까 명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만 확실히 일본의 몽블랑이 펜을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일례로 이런 일이 있었다. 만년필에게 가장 추천되는 것은 자기 브랜드의 잉크를 넣는 일이다. 그러니까 몽블랑 만년필에게는 몽블랑의 잉크를 넣고 파일롯트 만년필에게는 파일롯트 잉크를 넣는 것이다. 내가 쓰는 주력기가 몽블랑이었기에 나는 언제나 몽블랑 잉크만 썼는데 하필 내가 일본에 왔을 때 잉크가 똑 떨어져 내 만년필에 부랴부랴 세일러의 잉크를 넣을 일이 있었다.
문제는 세일러 만년필은 일본어 - 그러니까 한자를 쓰기 좋게 촉이 얇고 섬세하고 단단하고 몽블랑의 만년필은 알파벳에 최적화되어있기에 둥글고 부드러운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몽블랑의 잉크는 세일러의 잉크보다 좀 더 점성이 있는 편이다. 세일러 펜에 세일러 잉크를 쓸 때도 '와 생각보다 잉크 빨리 떨어지네 잉크가 묽은 편인가 보다' 생각은 했지만, 몽블랑 바디에 세일러 잉크를 넣으니 그 특유의 묽음이 몽블랑 바디와 시너지를 더해 더더욱이나 묽은 필기감이 두드러지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자세히 하지 않고 "급해서 몽블랑 바디에 세일러 잉크를 쓰고 있는데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잉크도 같이 구매 가능할까요?"라고 물었더니 직원이 막 웃으면서 "세일러의 잉크 확실히 몽블랑에게는 좀 묽은 감이 있죠."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고 정말로 펜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구나. 한국에서는 이 펜이 얼마나 기념비적인지, 얼마나 나를 빛내주는지만을 설명한다면 이 직원은 그냥 펜을 펜 그 자체로 봐주는구나. 이게 필기감이 어떤지 얼마나 기능적으로 좋은 퍼포먼스를 내는지 알아주는구나 라는 생각에 무척이나 감동했다.
계속 만년필을 모을지도 사실 잘 모르겠고 (갖고 싶은 펜들은 전부 이미 품절이다!) 두꺼운 촉의 만년필들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고 - 언젠가는 두꺼운 만년필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 있는 만년필들 만으로도 내 필기생활은 아주 충분하다 사실. 길도 나에게 맞게 잘 들였고 한자를 쓸 일이 많을 때는 한자 전용 펜 역시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몽블랑을 비롯한 다른 브랜드들은 예쁜 펜들을 내놓을 거고 나는 가방 사듯이 또 펜을 새로 살지 모르겠지만.. 어떤 펜이던 사각사각 종이에 걸리는 감각, 손에 착착 감기는 감각은 아마 시간을 들여 내가 길들인 만년필을 따라오기 힘들 것이다. 새로운 것이 주는 행복이 가득한 시대에 시간이 지난 것이 주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이템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