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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한 Oct 07. 2023

멈출 수 없는 허영

하나가 있어도 두 개가 갖고 싶다. 바로 가방이다.

남자들은 시계와 차를 모으고 여자들은 보석을 모은다지만 나는 보석이 아닌 가방에 대한 집착이 있다. 허영이라면 허영이지만 사실 나는 그것보다 더 최악의 단어로 내 가방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 약간의 강박이 있다.


왕년에 샤넬에서 이름 날려줄 정도로 가방이건 뭐던 물건을 사모았다.

무슨 말 따라 누구는 가방을 사면서 스태프들과의 밀당 - 그러니까 상류사회의 티키타카를 즐긴다고 하는데 나는 정말로 가방을 사모으는데만 집중했다. 상류사회의 티키타카는 내가 잘하는 것도 아니고 소모적이고 이유 없는 대화는 내 취향도 아니기에 정말로 가방을 사 모으는데만 집중한 자본주의의 꿀맛을 뚝뚝 느끼는 매일이었다.


한동안 시가나 독서 만년필 와인 등 삶에서 낭만적인 부분 - 그리고 좀 더 취향적인 부분에 집중하면서 가방과 자본주의의 삶에서 멀어졌지만 개버릇 못준다고 벌킨이 내 물욕에 포문을 열면서 벌킨 다음에는 켈리를 사기 위해 쓸데없이 자원들을 낭비하는 삶이 이어지고 있다. 자연히 자본주의의 꿀맛에서 성찰의 괴로움은 멀어지기 마련이라 머릿속 가득 채워지는 것은 가방을 - 그것도 원하는 색깔을 사기 위한 투어. 그리고 어떻게 그 가방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 그 외에는 전혀 없는 말 그대로 가방이 머리를 지배하는 삶을 요 며칠 보냈다.


그날도 원하는 색깔의 가방을 구하기 위해서 백화점을 기웃거리던 중이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모든 것이 페이드 아웃 되면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단어들이 생소하게 들리는 그런 날이 있다. 그날도 나에게 그랬던 것 같다. 앱송이니 토고니 클라망스니 이야기하는데 매일 듣던 그 단어가 갑자기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토고는 무엇인가. 앱송은 무엇인가. 클라망스는 무엇인가... 한 번도 깊게 생각하지도 -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색깔과 크기가 가장 중요했으니까.

새삼스럽게 - 내가 사려고 하는 것이. 가죽 가방.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도축하고 희생해서 만들어진 - 아마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가죽을 거르기 위해서 몇 번이나 고르고 골랐을 - 무엇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토고란 어린 송아지의 가죽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면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가방은 어린 송아지를 희생시켜서 만든 가방인 것이다.


나는 허영을 멈출 수 없다. 이 반짝거리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이 물건이 주는 행복을 거부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설령 무엇인가의 생명을 희생시켜서 얻는 쓸모없는 결과라고 해도 말이다.


도살이라는 의미에서 먹는 것도 걸치는 것도 똑같다고 말할 수 있지만 먹는 것은 생존을 위한 행위이기 의미가 있다. 하지만 가방과 옷은 먹는 것과 매우 다르다.

나는 이 가방이 없어도 귀엽고 든든한 천가방들이 꽤 있다. 내 손에 든 가죽가방. 과연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허영이 뭘까.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생각이나 행동이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나 스스로 생각에 허영이란 내 그릇에 안 맞는 옷을 입는 것 같다. 그렇게 친다면 나는 얼마나 많은 내 그릇에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는가. 남들은 그것이 내 그릇에 맞는다고 할지 모른다. 

글쎄... 내가 내 그릇의 크기를 알 수 없는데 어떻게 남들이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언제나 나는 사람들은 내 생각보다 남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하면서 반대로 남들이 봤을 때 허영으로 보이는 사치를 내가 원한다는 이유로 자기 합리화시켰던 것은 아닐까? 내 이 많은 가방을 향한 집착과 열정에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명확하게 답을 낼 수가 없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뭐든 하겠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어떠한 필요 없는 희생 위에서 치러지는 행복이라고 하면 그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생각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글을 쓰는 순간에도 갖고 싶은 것들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 가방이 있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는 것도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닌데 나는 그냥 나를 위해서 뭔가 하고 싶다. 그게 갖고 싶다. 하지만 또 어느 송아지의 피의 무게를 견딜 자신도 없는 겁쟁이이다. 사치와 허영, 그리고 필요와 욕망 어디서 그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 내가 하려는 일은 정말로 옳은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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