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시대의 어떤 세대의 사람인가.
지금이야 스트리밍이라는 것이 잘 되어있는 시대지만 클래식을 자주 듣는 사람은 알 것이다. 클래식 업계에서 아직까지 먹어주는 것은 바로 CD라는 사실 말이다.
나 역시 클래식 음악을 듣는 연유로 지금이라면 이런 고물을 누가 들고 다니나요 하는 휴대용 시디플레이어를 하나 갖고 있다. 황학동 시장에서 5만 원 주고 사온 시디플레이어. 몇 년 전에 샀는데 지금까지도 어찌어찌 잘 버티고 있다. 집에서 듣는 오디오 시스템처럼 화려한 소리를 뽑아내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 좋은 헤드폰을 끼고 들으면 괜찮은 소리를 뿜어낸다.
또한 온갖 iot 네트워크에서도 자유롭다. 네트워크가 없으면 음악 재생도 안되기 일쑤인 시대에 이 친구는 비행기 안에서도 자유롭고 언제나 쾌적한 음악을 제공한다. 언제나 비행기 안에서 들을 음악 리스트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귀찮은 일 없이 시디 몇 장만 챙겨서 계속 듣고 또 들을 수 있다는 점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하지만 가끔 당황스러운 경험을 할 때가 있는데 바로 전원이 건전지라는 점이다. 얼마나 배터리가 남았는지 표시도 되지 않고 갑자기 잘 듣고 있다가 뚝 꺼진다. 그리고 언제나 건전지 두 개를 같이 들고 다녀야 한다. 충전기가 없으니까. 현대의 리튬 배터리로 만들어진 물건이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경험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현대 문명에 익숙해져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이 물건이 내 손에 오기까지의 여정을 가만히 생각해 본다. 휴대용 시디플레이어는 대충 한 20년 전쯤에 - 지금의 mp3가 나오기 전에는 정말로 획기적인 물건이었다. 아마 이 물건을 맨 처음 산 사람도 ‘최신’의 물건을 손에 넣었다는 생각으로 무척이나 귀중하게 생각했겠지. 그 친구가 어떻게 황학동으로 가고 다시 내 손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쉽게 플레이리스트를 만들 수도 없고 그나마 선택권이라고는 싫어하는 노래를 뛰어넘고, 좋아하는 곡은 계속 들을 수 있는 것 밖에 없다. 전의 주인도 계속 해서 좋아하는 가수의 CD를 반복해 들었을 것이다.
이 친구는 아마도 mp3라는 획기적인 물건이 나오면서 세대를 넘겨주게 되었을것이다. 어느 집구석에서 조용히 지키다가 이사 때 황학동으로 왔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저기서 거친 대접을 받다가 황학동 엔지니어의 손에서 여러 부품과 함께 다시 태어나 내 손에 오게 되었다면 꽤나 마음 아픈 일이다.
지금 저 시디플레이어를 들이밀면 아는 친구들은 아주 드물 것이다. 심지어 시디플레이어를 만든 브랜드는 파나소닉이다. 파나소닉을 아는 사람도 드물 텐데! 시대가 엄청나게 빨리 변하면서 내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어린 친구들은 내가 어르신이라고 받아들이겠구나. 느낀다. 예전보다 훨씬 더 세대라는 단어가 세부화된 느낌이라고 할까.
예전만 생각해 봐도 그렇지 않은가? 바로크 시대에서 르네상스 시대 사이에는 몇 백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야 거대한 세대 변화를 느낄 수 있었는데 지금은 한 사람의 30년 인생에도 엄청나게 많은 변화가 오간다.
10대라는 나이 사이에서도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세대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너네도 30대 되면 나이보다는 어떤 시대의 경험을 하고 살았냐가 중요해진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빨리 유행과 기술이 발전되는 시대에서 세대는 내가 느끼는 속도 보다 더 아니면 내가 경험했던 것보다 더 빨리 움직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이제는 시대 - 세대보다는 개인의 역량에 집중하는 핵개인이라는 단어가 최근 무척이나 화두가 되는 것 같다. 이제 시대와 세대를 쪼개고 쪼개다 못해 개인이라는 것으로 원자화되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내가 개인으로서 어떤 원자인지 어떠한 개성을 갖고 사는지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세대가 나를 낙인찍었다면 (지금도 그럴지도. MZ라는 단어 없이 요새 사람들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나 싶다) 이제는 오롯이 나 하나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집중하게 된 것은 무척이나 기쁜 일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의 나는 어릴 때의 나보다 훨씬 더 흐릿한 사람인 것 같다. 트렌드에 밝은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오타쿠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에 정통한 사람도 아니다. 어릴 때는 이것보다 더 확실하게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기 쉬웠던 것 같은데, 이제는 개인보다는 내가 해온 시대의 경험으로 나를 정의하는 게 더 빠른 사람이 된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나의 고민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 핵개인의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세대는 없어져도 시대는 남지 않을까. 이미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