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박살 난 인간관계의 필드 위에서.
요새처럼 인간관계가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적이 많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거의 2차 대전의 연합군의 폭격을 맞은 드레스덴 수준이다. 예전에도 몇 번의 포격이 내 인생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때는 무척이나 뜨거운 온도로 인간관계가 갈라지는 것을 받아들였다면 지금은 이제 나는 산전수전을 다 겪어서 웬만한 것에는 무뎌진 멘털을 가졌다는 것뿐이다.
이제는 인간관계가 박살 나는 이유가 내 탓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많은 사람이 떠났다. 그 가운데 교집합이 유일하게 나뿐이라면 문제는 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어떤 면이 사람을 질리게 만든 걸 수도 있고 어떤 면이 관계를 부서지게 쉽게 만든 걸 지도 모른다. 무엇인지 알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러면 다음 인간관계는 좀 더 나을 텐데. 마음이 아프다.
오랜만에 북한산에 올랐다. 그러면 생각정리가 좀 될까 싶어서. 살찐 내 뱃살만큼 내 폐활량은 정확하게 반비례하더라. 폐가 아플 만큼 산을 타고 나도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냥 폐가 아프다. 앞으로 득도를 하겠다고 이런 멍청한 짓은 하지 말고 둘레길이나 걸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 뒤에 도원사에 가서 소원을 빌어보았다. 무슨 소원이고 하나는 꼭 들어준다길래. 이미 소원을 바라고 절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완전히 세속에 찌든 사람이라는 증거이겠지만. 그리고 부처는 자기 수양을 한 존재이지 사실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는 아니지 않은가. 기적을 행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마애불 앞에서 소원을 빌어보았다. 제발 들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마음만은 간절했지만 - 한편으로는 당연히 될 리 없겠지.라고 생각하는 나 역시 있다.
폭격 맞은 마음에 흔들리는 나는 여기저기 어떻게든 수양으로 중심을 잡아보려고 노력하는데 잘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어찌 되었던 - 과연 폭격을 맞은 인간관계는 재건이 가능할 것인가? 불가능할 것 같다. 일단 지금은 말이다.
어릴 때처럼 마냥 아파서 울 것 같은 날들은 없고 건조하고 작은 불씨조차 없는 파괴된 마음의 흔적을 보자니 수많은 불행을 겪었기에 불행 앞에 담담해질 수 있는 내 신세가 그냥 웃음만 나왔다. 불행을 훈장으로 삼아야 하다니! 이 얼마나 가엽단 말인가. 행복을 훈장으로 삼는 사람도 아주 많은데 나는 불행들을 늘어놓고 음. 이 불행은 좀 덜한 불행. 이 불행은 좀 큰 불행. 하면서 불행들을 서로 비교하고 있다. 이게 내 팔자라고 생각하니 헛웃음과 욕지거리만 나온다.
불행을 담담하게 구경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살면서 온갖 불행을 겪어서도 있지만 사실은 떠나간 자리에 또 다른 것들이 들어오고 삶은 계속된다는 진리를 일찍이 알아서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 사람과 사람은 헤어진다. 사람이 비운 자리에 다른 무엇이 들어올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당장 두 시간 뒤의 일도 추측만 가능하지 뭐가 일어날지 모르는 게 인간인데.
수많은 인간관계의 실패를 겪다 보니 더 이상 사람들에게 마음을 쓰는 것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내가 정말로 극도의 고독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게 요새 나의 고민이다. 나에게는 친구가 없다. 고양이뿐이다.
다행히도 수많은 예술과 책과 게임이 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했기에 나는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책 많이 보면 미친다고 하던데 내가 곧 그런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나오는 탑의 현자처럼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소름이 끼치는데 사실상 이렇게 가다 보면 내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책을 너무 많이 봐 미친 현자가 되는 길 같다.
아니다. 한 번쯤 나처럼 엄청난 고독에 몸을 담갔다가 꺼내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그 과정을 시작하는 중이고, 아마 더 멀리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이기에 그 고독의 길에 내가 뭘 해야 하고 어떻게 될지 감이 안 잡혀서 두려운 것뿐. 그리고 집단지성을 신봉하는 나이기에 집단 지성이라는 길을 벗어나서 내가 크게 진화할 수 있을지 솔직히 두렵다. 우물 안 개구리가 진화해서 얼마나 진화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
완전히 개박살 난 지금의 내 인간관계에서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물 안에 들어가서라도 상처를 할짝이는 것뿐이라지만 사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그것일지도 모른다. 우물 안에서 상처를 달래겠다고 가방 쇼핑이라도 하지 말아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