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한 Oct 19. 2023

향(香)

가정폭력이 나에게 남긴 재능 중 하나.

약간 웃기는 이야기지만 가정폭력이 나에게 남긴 유일한 좋은 점이라면 내가 오감에 민감하다는 거다. 

청각은 아주 예민하다. 왜냐면 수많은 날들을 불안에 떨었어야 했고 어딘가 어두컴컴한 방에서 부모님이 싸우는 소리로만 바깥 상황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으니 청각이 동물 수준으로 발달하는 것은 놀랄 것도 아니다.


그리고 미각. 이는 어머니가 요리솜씨가 별로 좋지 않은 분이라는 점과 긴 세월 중에서 홀어머니 아래서 자랄 때는 언제나 가난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에 나에게 좋은 음식은 사치였다. 아버지가 어머니랑 사신 몇 년을 제외하고는 나에게 과자는 사치였으며 매우 보기 드문 것 중 하나였다. 어느 날은 콜라가 너무 먹고 싶은 나머지 집에 콜라병에 있던 간장을 콜라라고 착각하고 마셨던 적도 있을 정도니.


그 덕에 시판되는 당이 많거나 간이 센 음식들은 거의 먹을 수 없었고 직장인인 어머니의 요리 레퍼토리는 맨날 같았기에 절에 있는 동자승보다 고기를 더 안 먹었다. 우리 집에서 고기란 매우 한정된 자원이었으니 조금이라도 커야 하는 동생에게 언제나 고기를 양보했다. 동생은 잘 모르겠지만 닭볶음탕을 만들면 언제나 나는 고기를 별로 안 좋아한다는 이유로 동생에게 고기를 양보했다. 동생 조금이라도 더 먹으라고. 누나가 이랬단다. 동생아.


어쨌든 가정폭력이 남긴 가난 덕분에 간이 센 음식이나 고기 같은 것은 거의 먹을 수 없었으니 나는 자연스럽게 채식과 생선위주의 식습관을 갖게 되었고 그는 나이가 먹고 남들보다 예민한 미각으로 나에게 혜택을 돌려주었다.


후각은 조금... 복잡하다. 내 생각에 내가 후각은 좋은 것 (집에서 나는 이상한 냄새의 원인을 귀신같이 찾아낸다) 같은데 정확하게 무슨 냄새인지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다. 

후각은 경험이다. 하지만 나는 도시에서 자랐기 때문에 계절에 따른 공기의 냄새나 날씨의 냄새, 그리고 어릴 때 몇몇 기억에 있는 꽃 냄새 말고는 다 뒤늦게 술과 와인으로 후각을 키워냈다. 후각을 키울 정도의 경험을 많이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향수나 향처럼 향기를 내는 물건이다.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양질의 물건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향에도 등급이 있어서 저렴한 물건의 향들은 오히려 사람의 머리와 마음만 고통스럽게 만들 뿐 향이 사람에게 주는 좋은 영향들을 누리기 쉽지 않다. 그러기에 나는 향을 내는 물건을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향을 내는 물건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나에게서 향을 내는 물건, 집같이 공간을 꾸미는 물건.

전자는 향수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디퓨저나 룸 스프레이 등으로 대변할 수 있을 것이다.


향수를 먼저 말하자면 취향의 향과 블렌딩을 찾는데 너무 많은 실패를 겪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조말론에서 올해 돈 많이 쓰셨다고 연말 선물을 보내줄 정도로 실패했다. 

시향이라는 좋은 방법이 있지만 시향은 결국 향의 가장 첫인상을 좌우할 뿐 내가 걸치게 되면 나와 잘 어우러지는지 잔향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결국 사고 실패하고 벼룩에 내놓기를 무한정 반복하고 난 다음에 나는 내가 어떤 노트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고 그 노트가 들어있는 향 중에서 최적의 향을 찾는데 시간을 들인다. 아 정말로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술은 먹어서 없어지기라도 하지만 향수는 유통기한 내에 다른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


다만 향수는 TPO에 따라 예의에 어긋나기도 한다. 생각해 봐라. 맛있는 레스토랑에 갔는데 옆에 있는 사람의 향수냄새가 찌를 듯하여 음식에 집중할 수 없다거나 내 취향의 향수가 아닌 사람 옆에서 몇 시간이나 공연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면 향수를 뿌리는 건 자기만족은 될지언정 다른 사람의 만족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향을 즐기긴 하지만 향수를 뿌리는 일은 매우 적어지게 되더라.


반대로, 집은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할 수 있어서 조금 자유롭다. (조금인 이유는 우리 집에 고양이가 있기에 고양이 친구들의 건강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마음껏 태울 수는 없다.) 요 몇 년 동안 향을 내는데 향로라고 하여 일본의 '일본향당'이라는 곳에서 만든 향로와 향으로 집을 꾸미고 있다. 손님이 오는 날은 꼭 신발장에 쟈스민의 선향을 태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향이기도 하고 손님에게 맨 처음 얼굴이 되니까.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에도 '인센스'라고 하여 중동 쪽에서 여러 가지 향들이 다양하게 수입되는 것 같다. 성수동이나 압구정 등 젊은 사람들이 많은 동네에 가면 심심치 않게 향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양질의 향을 쉽게 접하기는 어려운 구조라고 생각한다. 아마 화학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고 수입하는 과정에서 돈이 많이 들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물건의 종류는 너무나 희박하고 겨우 새로운 물건을 발견해서 향을 태워보면 향 역시 그렇게 양질의 향이 아닌 경우가 너무 많다. 조금 실망스럽다.


유행에 편승해서 찍어내는 향료가 들어간 제품들도 아쉽긴 마찬가지다. 최근 북촌에서 무척이나 크게 가게를 낸 유행하는 국내 향수가게에 간 경험이 있는데 향의 다양성은 제하고도 기본적으로 향의 지속성이 무척이나 좋지 않아서 실망했다. 그런데 금액은 만만치 않다. 수입하는 제품들은 수입하는 제품이라 그렇다 하지만 국내 제품들은 국내의 조향사들이 조향하고 국내의 제품으로 만들 텐데 왜 그럴까 가만히 생각해 봤다만.


지금 시대에서 향은 예전의 사치품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하나의 아이템으로 바뀌었고 - 마켓이 커지자 그냥 시장을 선점하고 브랜딩 하는데만 집중하지 향을 만드는 기술과 조향 능력에는 크게 집중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다 향은 결국 경험과 기억이라서 엄청나게 많은 경험과 기억, 그리고 그것을 잘 캐치하는 능력이 있어야 좋은 향 제품이 나오는 법인데 일단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경험을 하기 쉽지 않다. 그러니 좋은 제품이 나올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우리는 코로나라는 긴 시간 동안 후각과 단절되는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최근에 한국에서 브랜딩 하는 향 관련 브랜드들은 대부분 코로나 시기에 급성장한 브랜드들이다. 과연 양질의 향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더 의문이 든다.


우리나라라도 남쪽지방에서 자랐으면 동백이나 목서 등 여러 꽃나무의 향을 맡고 자랐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는 은행냄새와 아카시아 냄새만이 지배하는 북쪽지방 출신이라 글쎄. 도시의 사람들이 날씨와 계절에서 느껴지는 공기의 변화 말고 다채로운 후각의 경험을 할 수 있을까? 미지수다. 나 역시 내가 갖고 있는 꽃과 향의 기억은 대부분 남쪽지방인 부모님의 고향이나 일본에서 생긴 것이니 말 다했지.


나 역시 공기나 - 계절의 변화가 아닌 자연에서 갖고 있는 기억의 향노 트는 어릴 때 좋아했던 금목서의 향이나 학교 등굣길에 만날 수 있었던 장미 내가 키웠던 몇몇 허브가 아니라면 향에 대한 구별능력은 전부 후천적으로 내가 훈련한 것들이다. 

조금 바라는 게 있다면 나보다 어린 친구들은 그런 후천적 훈련 없이 기억에 남는 추억을 부르는 향의 노트들의 경험을 많이 할 수 있길 바란다. 어린 친구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넓은 세상에서 일하고 더 많은 사람들과 많은 경험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그 세상 속에서 어렸을 때의 추억이 서린 향은 언제나 그 시절로 그 친구들을 소환하는 좋은 반려가 되어줄 것이니 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운수 좋은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