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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한 Nov 04. 2023

고독

오롯이 혼자가 된다는 즐거움

엄청나게 가공할 경험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일도 있지만 별거 아닌 일에서 나를 발견하는 경험도 있다. 그렇다. 생각지도 못하게 - 별거 아닌 일에서 나를 발견했다. 내가 생각보다 고독을 즐기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


전화기와 노트북을 반납해야지만 들어갈 수 있는 북카페가 근처에 있길래 한번 가봤다. 한 손에는 쇼펜하우어의 책을 든 채였다. 

솔직히 말하면 둘 다 평소의 내가 할 선택은 아니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느라 꽤나 고생했기에 쇼펜하우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고 - 나에게 북카페란 스타벅스랑 다른 점을 못 느끼는 장소이다. 다만 그날은 강남 바닥에서 그렇게 조용한 장소가 없을 거다!라는 그 북카페의 광고글 때문에 충동적으로 그곳에 가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날의 읽을거리로 교보문고에서 구매한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을 들고 말이다.


일단 그 북카페가 광고한 것처럼 생각보다 조용하지는 않았다. 강남 바닥에서 조용한 곳은 찾을 수 없다. 나는 조용해도 주변은 언제나 번잡하기 마련이다. 공사하는 소리가 귀를 계속 때렸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평일 낮이라 내 주변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 덩그러니 옥상 위에 앉아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 경험을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음악도 없고 손에 든 책 하나와 만년필과 나. 그리고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그렇게 큰 위로가 될지 몰랐다. 내가 생각보다 옆에 낯선 누군가가 있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고 이어폰의 음악소리가 없이도 귀를 거슬리는 소리가 없으면 내가 쉽게 집중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이 그렇게 재밌고 쉽게 읽히는 책일지는 몰랐다는 것 모두가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 혼자서 - 나 혼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경험이라는 것이 나를 무척이나 고양시켰다. 아마 누군가와 같이 있었다면 옆에 있는 사람을 신경 쓰느라 조금이라도 신경이 쓰였을 것이고 내가 평소에 혼자 자주 시간을 쓰는 방식인 집에서 책을 보며 뒹굴거리거나 - 자본을 펑펑 쓰며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방식이 아닌 내가 전혀 하지 않을 선택을 해 새로운 발견을 해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좋았다.


어쩌면 때와 시간 그 모든 게 그냥 우연히 맞은 걸 수도 있다. 다만 내가 뭔가 큰 것을 하지 않고 - 그냥 혼자 있어서 행복해한다는 사실이 나에게 무척이나 놀라웠다. 원래 혼자 잘 노는 사람으로 유명하다곤 하지만 요 얼마간 폭망 한 인간관계 위에서 발을 딛고 서있다 보니 내가 인간관계를 능숙하게 하지 못한다는 패배감? 아니 자책감이 어찌하나 있는 편이었다. 다른 인간관계라도 같은 방식으로 인간관계가 박살 났다면 원인으로 교집합인 나를 탓하게 된다. 그렇다. 박살 난 인간관계에서 찾을 수 있는 교집합은 나뿐이었다.


하지만 오롯이 나 혼자 있는 이 경험은 비싼 대가를 치른 것도 아니고 - 혼자서도 이렇게 완벽한데 쓸데없는 인간관계에 시간과 정성을 많이 쓴 게 아닌가 스스로를 반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하필이면 손에 있는 책조차 쓸데없는 인간관계에 에너지 쓰지 말고 혼자 노는데 집중해라라고 말하는 쇼펜하우어의 책이었다.) 


나의 에너지를 꺼내 다른 사람과의 인간관계를 얽는데 집중하면서 스스로를 텅텅 비게 만들었던 것은 아닌가.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던 거 아닐까. 그렇게 애타게 원하던 인간관계 - 사람과의 시간이 아니라 나와의 시간에 집중하는데 이렇게 충만함을 느낀다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실 내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써버린 시간과 돈은 어쩔 수 없다. 나한테 쓰면 가방이라도 몇 개 샀을 텐데 아쉽기 그지없다만 그 좋은 시간들을 선사해 준 데 대해서 감사한 마음도 있다. 

그리고 어디선가 그 사람과의 인연을 멈추게 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나와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겨우 알게 되었다.

정말 이제야 혼자라서 완벽해졌다는 기분이 들어 무척이나 행복하다. 아마 손에 쥐고 있었던 책이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이라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끊임없이 다 부질없다고 말하는 몇백 년 전의 그 사람은 - 인간의 고민이라는 것이 사실 인류가 탄생한 이래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뭐가 되었던, 삶에서 몇 안 되는 소중한 경험을 한 날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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