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도 끊고 - 술도 끊고 - 말 그대로 반 수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남는 길이라고는 몇 개 없다. 운동 중독이 되거나 아니면 게임중독이 되거나. 아니면 뭐라도 중독이 되거나. 안타깝게도 도파민이라면 환장하는 나는 이때까지 밀렸던 책과 클래식 CD를 밀어내듯이 듣고 있다.
그 과정에서 DECCA의 CD전집을 발견했다. 자주 가는 레코드 가게 사장님께서 추천해 주신 프랑스 음악과 러시아 음악을 잘하는 전집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사뒀던 아이.. 뜯지도 않았는데 전집 안에 모리스 라벨의 세헤라자데가 있는 걸 보고 뜯었다. 역시 이 집구석은 뭐든지 찾으면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발견해 낸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가 더 유명하지만 모리스 라벨 역시 세헤라자데를 주제로 한 음악을 발표했다. 물론 진행은 무척이나 다르다.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교향악곡답게 환상적인 위풍당당하고 - 화려함을 뽐내는 반면 모리스 라벨은 그 특유의 몽환적인 소리에 소프라노가 얹어져 있다.
동양의 세헤라자데는 프랑스의 동양학자 갈랑의 손을 거쳐 시작되어 영국의 탐험학자 버턴이 번역한 것으로 1885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물론 그 시대가 에로티시즘과 팜므파탈 그리고 세기말 분위기가 잔뜩 녹아있던 시대인 것을 생각하면 동양에서 넘어온 에로틱한 이야기에 작곡가들이 영감을 받지 않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허구의 인물이겠지만 세헤라자데는 지금을 사는 나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뭐 속된 말로 얼굴도 예쁘고 말도 잘하고 심지어 똑똑하기까지 한 세헤라자데에 반하지 않을 남자는 현대에도 없겠지만 그녀는 같은 시대의 다른 미녀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물론 그녀가 동양 출신이라는 점 덕에 살로메나 유디트 같은 동시대의 같은 신화 속의 여성들에 비해 예술가들 같은 2 창작들에게 크게 주목받지 못한 점(?)도 있지만, 어쨌든 아라비안 나이트에는 그녀의 입담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지언정 그녀의 미모에 대해서는 예쁘다는 말 말고는 크게 남겨진 것이 없다. 언제나 썰을 풀고 - 내일 이야기하겠습니다 하고 그녀는 이야기만 남기고 사라진다.
뭐 사실 그녀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화자이지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그녀에게는 외모를 뛰어넘는 매력이 느껴진다. 주인공이고 미녀여야 하고 - 그리고 그것으로 먹고사는 게 중요한 시대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크게 주인공도 아니면서 외모로 목숨을 구한 것이 아닌 입담과 지혜로 목숨을 구한 용감한 여주인공은 사실상 화목란 말고는 없을 것이다.
그 묘한 차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작은 용기를 준다. 머릿속에 지식을 구겨 넣는 거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고, 차라리 이 시간에 의느님과 상담하여 제2의 인생을 돈으로 찾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지만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을 던져 도박을 하는 배짱도 있었고 심지어 그 도박에서 이기는 뛰어난 두뇌까지 있었다. 이는 의느님이 줄 수 없는 미덕이다. 그 용감한 모습에 나도 저런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내심 생각하게 된다.
내 왼손 팔목에는 Audaces fortuna iuvat이라고 쓰여있다. 'Fortune favours the bold'. 운명은 용기 있는 자의 편이라는 말인데 아이네이스에 나오는 말이다. 죽을 때까지 잊지 말아야지 하고 새겨 넣었다.
용기는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덕이다. 반대로 말하면 나는 소심하고 겁쟁이라는 말이다. 수많은 겁나는 순간을 용기를 내지 않으면 다른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말로 스스로를 밀어 넣었다. 단순하게는 평소에 내가 하지 않을 것 같은 - 내키지 않는 일에 새로운 도전이라고 밀어 넣기도 했고 크게는 외부의 나를 상처 주려는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고 분노로 품위를 유지하는데 쓰이기도 했다. 대체적으로 그 결과는 좋던 안 좋던 나에게 알지 못하는 세계를 열어주었고 (심지어 자살시도를 하는 용기까지 주었다.) 전쟁터에서 구르고 구른 장군처럼 내 영혼에는 크고 작은 상처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이 용기가 만용이 되는 순간 아마 나는 정말로 세상을 뜰지도 모르고, 계속 용기로 남아있는 한 이 용기는 내 불안장애와 나를 상처 주는 것들에서 나를 지켜주는 큰 방패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세헤라자데처럼 - 현명한 두뇌를 가져야 나는 용기와 만용의 그 경계를 잘 넘어 다닐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세계라는 거대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도 지혜는 꼭 필요하다.
내가 세헤라자데처럼 용기 있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오늘도 의느님과 상담해서 제2의 인생을 찾아볼까 싶은 구렁텅이에서 박힌 자존감을 구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