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병장병장 Sep 04. 2019

세 개의 복주머니

소년은 먼 길을 떠나야 했다. 맛있는 과일이 나고,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곳을 찾아가려면 일찌감치 나갈 채비를 해야 한다. 언제까지고 소년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 안에서 머물 수는 없었다.  그는 중간중간 허기가 질 것을 대비해 먹을 것을 싸고, 옷이 헤질 것을 생각해 여분의 옷가지를 챙겼다. 그렇게 짐을 싸놓은 보따리의 배가 차차 불러갈 때쯤에 소년의 어머니가 3개의 복주머니를 건넸다. 알록달록한 것이 맛있는 사탕이 담겨있을 것처럼 생긴 것이었다. 허나 소년의 생각은 빗나갔다.

“애야, 어미가 먼 길을 떠나는 게 걱정돼 복주머니 3개를 준비했단다. 어려움이 생기거든 하나씩 꺼내보렴”


소년의 어머니는 알쏭달쏭한 말과 함께 소년에게 복주머니를 주었다. 소년은 물음표가 담긴 표정으로 어머니께 ‘이게 무엇인지’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년은 달콤한 사탕을 기대했던 것과 달리 의미를 알 수 없는 복주머니들이 수중에 들어오자 짜증이 일었다. 그렇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얼굴에까지 표정이 드러날 때, 그의 어머니는 다시 한 번 당부했다. 결국 소년은 절대로 가벼이 여기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나서야 복주머니를 주머니에 꼭꼭 숨겨두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여름이 되자 소년은 처음 가졌던 마음가짐을 잃기 시작했다. 가도 가도 끝없이 평야에 달라지지 않은 풍경을 며칠째 보자 소년은 지쳐갔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약속했던 다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결국 소년은 살갗을 파고드는 햇볕에 백기를 들었다. 그는 근처에 큰 나무 아래로 가서 몸을 뉘였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소년은 시원한 그늘과 아늑한 나무 밑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한참을 지나 소년의 의지가 다 더위에 녹아 흘러내릴 때쯤 주머니에서 어머니가 주신 복주머니 하나가 떨어져 나왔다.

“애야,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매일 해보고 가야하는 길이 있다면 하루하루 조금이라도 걸어야 한다. 적고 많음은 너의 재량이지만 하고 하지 않음을 용납 되서는 안 된단다.” 


소년은 어머니의 복주머니를 읽고 뒤통수가 아려왔다. 어머니와 가족들의 기대감과 주위 사람들의 격려가 다시 떠올랐다. 소년은 다시 짐을 꾸렸다. 그는 몸이 물에 젖은 솜마냥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소년은 이제는 그늘 밖에서 나와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걸어가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계절이 지나 단풍이 들고 완연한 가을이 되자 소년은 다시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도 도착할 곳은 아직 보이지 않은 것이 불안해졌다. 소년은 도대체 언제쯤이면 모든 것이 풍족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당도할지 알 길이 없어 답답함이 차올랐다.  그에겐 당장 눈에 보이는 가을이 빚어놓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풍경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또 밤에 우는 귀뚜라미의 노래 소리는 단순히 밤잠을 방해하는 공해에 가까웠다. 그렇게 소년은 오직 목적지를 향해 밤낯을 며칠동안 꼬박 걸었다. 그러다 소년이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그의 지친 몸뚱아리는 자그마한 돌부리도 이겨내지 못했다. 소년은 분에 못 이겨 길 한복판에 쓰러져 대성통곡했다. 한참을 울고나니 돌부리에 넘어질 때, 떨어진 어머니의 복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복주머니를 열었다.

“애야, 높은 곳을 보고 올라가면 고개가 멈춰 시야가 좁아진단다. 앞만 보고 달려가면 쉬이 지치기 마련이란다. 주위를 살피거라.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들과 나무에 눈을 돌려 보거라” 


그때야 소년은 주위를 살펴봤다. 가을이 온 주변의 풍경은 은행과 단풍으로 노란빛과 붉은빛이 만연했다.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도 점차 뚜렷해졌다. 소년은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당부한 것처럼 주위를 돌아보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힘듦이 있으면 잠시 쉬더라도 멈추지 않았고, 가야할 곳이 아득해지면 주위를 둘러보며 마음의 안정을 삼았다. 


소년은 옷을 꺼냈다. 곳곳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쌓여있었다. 어느새 계절은 겨울에 다다랐다. 도착지에 가까웠는지 하나 둘씩 사람들이 보였다. 먼 길을 걸어온 덕에 사람들은 누추했지만 표정만은 밝게 빛났다. 하지만 혹한의 날씨와 눈보라는 소년과 사람들의 기를 꺾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눈덩이들에 주위의 사람들은 속속히 발길을 돌렸다. 소년은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한 발자국이라도 나아가고 주위를 살펴봤지만 이젠 그마저도 힘에 부쳤다. 결국 소년은 길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발이 묶여버렸다. 소년은 절망했다. 그때 소년의 머릿속에서 어머니의 복주머니가 떠올랐다. 그는 재빨리 마지막 하나 남은 복주머니를 열어봤다.

“애야, 먼 길을 떠난다는 건, 무언가를 이뤄낸다는 건 절대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란다. 그러니 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렴. 그리고 웃으며 화답하고 용기를 복 돋아 그들과 함께하렴” 


소년 주변의 사람들은 추위에 지쳐 처음 만났을 때의 기백은 찾을 수 없었다. 소년은 사람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들의 고충을 듣고 힘을 실었다. 마지막으로는 포기하는 사람 없이 함께 가자는 당부를 넣었다. 처음에는 소년 혼자서 응원을 주고받았지만 나중에 가서는 소년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다함께 힘을 주고받았다. 소년은 이들과 함께 나아갔다. 


초록빛이 조금씩 눈에 띄더니 어느새 숲과 들 전체를 아울렀다. 겨우내 조용하던 새소리도 다시 뚜렷해졌다. 봄이 왔다. 그리고 소년과 친구들은 마침내 도착했다. 소년은 우여곡절 끝에 깨끗한 시냇물이 흐르고 주렁주렁 과일도 매달려 있는 곳에 다다랐다. 소년의 친구들이 환호하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중에 소년은 주머니 속 3개의 복주머니를 다시 꺼냈다. 주먹만 한 크기의 복주머니에는 어머니의 지혜만큼 그간의 고생과 깨달음이 담겨있었다. 소년은 복주머니를 다시 열어 어머니의 말씀을 다시 되새겼다. 소년은 어느새 청년이 되어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한국형 히어로, 김보통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