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병장병장 Nov 15. 2019

지루함, 일상의 권태로움

지루한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거대한 몸집의 보라색 외계인을 만났다. 그는 금빛 건틀렛을 손에 차고 있었는데 그게 내 몸통만 했다. 잊지 못할 광경이었다. 얼마 안 있어 반대편에서는 퍼런 쫄쫄이 복장의 백인 하나가 뛰어온다. 어찌나 재빠른지 도로의 자동차를 앞지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맙소사 망치를 들고 공중을 떠다니는 남자와, 인간 형태를 한 로봇인지 사람인지 헷갈리는 강철 인간이 자리 잡고 있다. 답답한 물음표와 밋밋한 마침표로만 끝나던 내 일상이 느낌표로 점쳐지는 순간이다.


눈을 뜨니 고요한 버스 안의 풍경이 비친다. 몇몇 승객들은 내 머릿속 망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고개를 처박고 스마트폰을 보며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킥킥거리며 웃고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나름의 이유로 고된 몸을 못 이긴 채 곯아떨어졌다. 승객들은 하나같이 다 귀에 동그랗거나, 허연 콩나물 모양의 이어폰을 꽂고 있는데, ‘혹시 외계인과의 비밀 접촉?’이라는 재미난 상상을 해볼라 하면 이어폰 사이로 흘러나오는 신명 나는 댄스 음악 때문에 산통을 깨졌다. 어쩔 수 없이 시선을 창밖으로 옮겨본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잠실대교가 나온다. 아까 하던 상상을 마저 하려고 잠실대교를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이는 외계인과 인류의 사투를 머릿속에 그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러시아워에 묶여버린 버스에서 30분이나 같은 풍경을 바라보니 공상의 재료가 다 동이나 버렸다. 도저히 일상이 주는 지루함을 피할 도리가 없다.


이런 의문에 사로잡혀 누군가에게 지루함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을 물으면 사람들은 그 옛날 중국의 명인들처럼 나에게 사자성어로 명쾌하게 대답한다. “스. 마. 트. 폰” 나도 동의한다. 반박할 이견이 없다. 동영상이면 동영상, 음악이면 음악 세상 모든 즐거움을 담아내는 이 녀석은 일상의 지루함을 이겨 낼 만병통치약 같은 존재다. 하지만 스마트폰으로는 끝내 해갈되지 목마름이 있다. 문득문득 내 인생의 즐거움이 요 작은 화면의 스마트폰에 갇혀있다는 생각이 들면 서글프기도 하다. 또 어쩌다 스마트폰의 SNS로 학교 동창들, 전 여자 친구 등을 염탐하다가 지루함을 타파한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한없이 위축되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이들이 판에 박힌 일상을 이겨내기 위한 방법으로 결국 스마트폰과 SNS를 활용했다는 생각이 들면. 일상의 지루함을 털어버릴 스마트폰이라는 만병통치약이 어느 순간 우리를 잠식하고 있다는 오싹함이 느껴진다.


지루함을 익숙함에서 오는 권태가 같은 것으로 보자면 ‘현대인이 이를 피할 방법’이 있나 근본적인 회의감이 든다. 학생은 학교에, 취준생은 취업준비에, 사회인은 각자의 업무에 사로잡히다 보면 일상에서 오는 지루함을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다. 어쩌면 명품백, 외제차 같은 것이 사치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 뭐가 그리 좋은지 항상 방긋방긋 웃고 다니는 대학 동기 녀석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답은 의외였다. “올 때는 버스 타고 오고, 갈 때는 지하철 타고 가”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러다 이내 만능열쇠 스마트폰이 아닌 엉뚱한 대답에 기분이 좋아졌다. 녀석이 내놓은 해답에 행간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동기의 대답의 의미는 별게 없었다. 요약하면 “삶의 약간의 변주를 주자 그리고 그 변주가 등굣길과 하굣길처럼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괜찮다”였다. 동기를 보는 내 초롱초롱한 눈빛은 짜게 식었다. 거창한 대답을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시원찮았다. 나는 다시 동기와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나갔다.


권태로운 일상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자 지푸라기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속는 셈 치고 불타는 금요일 퇴근길에 변주를 줬다. 하찮은 것도 상관없다는 말을 믿고 내 퇴근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은 불금 퇴근길에 버스나 지하철이 아닌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는 정도의 사치는 괜찮을 것 같았다. 난생처음 따릉이에서 자전거를 뽑았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기에는 약간 낯선 복장으로 페달을 밟았다. 오랜만의 페달질에 어색함도 잠시 지금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라는 생각과 도시의 소음, 불금을 맞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니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왜인지 모를 웃음도 새어 나왔다. 어쩌면 일상이 주는 지루함을 타파할 해답은 가까이 있었을까. 어쩌면 내가 동기 녀석의 대답에 불만족스러웠던 것은 지루함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일까. 지루함에 대한 사색도 잠시, 자전거가 오르막길에 오르자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아서 내려서 자전거를 굴렸다. '요즘에는 전동 킥보드가 대세라는데' 월요일 출근할 때는 뭘 타고 갈지 오래간만에 가슴 설레는 고민이 생겨났다.  

작가의 이전글 마법사와 인간의 간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