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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장병장 Oct 21. 2019

마법사와 인간의 간극

“해리포터”를 아는가. 혹시 아직 보지 못한 사람을 위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마법사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을 여의고 이모네에 얹혀사는 해리포터 그리고 그의 친구 론, 헤르미온느가 함께 겪는 좌충우돌 성장기이자 모험담으로 아직까지도 전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콘텐츠다. 그 인기에 힘입어 영화로도 제작된 해리포터 속 나의 뇌리에 깊게 박힌 장면은 의외로 쪽방 안 해리포터의 삶이다. 모종의 이유로 못된 이모 부부에 의해 계단 밑 쪽방으로 감금당한 해리포터, 그 층간소음의 대비책도 없는 음침한 쪽방은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어리석음의 산물이었다. ‘어떻게 한낱 인간이 지팡이 하나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마법사를 당해낼 수 있을까’ 나는 영화를 마법사의 눈으로 본 것이다. 그러다 최근 해리포터를 복습하면서 다시 이 장면을 보고 전혀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마법과 극적인 탈출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자기의 조카를 더위와 추위에도 대응할 수 없는 쪽방에 가두면서, 막말을 서슴지 않는 이모 부부에 분노했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이 쌓이면서 영화를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다.


예상했다시피 이 장면의 결말은 해리가 탈출에 성공하면서 다시 호그와트로 돌아간다. 나는 자동차를 타고 훨훨 떠난다. 그런데 이 시퀀스처럼 비현실적인 일들이 우리 주변에도 존재한다. 물론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 내가 인간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 분노했던 비윤리적인 쪽방에 관한 이야기다. 현재 대학 청소 노동자들의 쉼터는 영화 속 쪽방과 비슷하다. 좁디좁은 방에서 변변한 냉방이 이뤄지지 않아, 쉬는 게 쉬는 것이 아니며 곰팡이가 펴 쉼터라는 의미가 무색하다. 다른 노동 인권의 사각지대가 그러하듯이, 결국은 사달이 났다. 2019년 8월, 고령의대학교 청소노동자가 쉼터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날, 그는 이른 새벽에 출근해 낮 기온이 35도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8천여 평에 달하는 건물을 쓸고 닦았다. 학생모임은 학교 측에 청소 노동자의 비인간적인 휴식환경 개선과 고인에게 예를 갖출 것을 요구했다. 영화와는 사뭇 다른 결론이다. 해리포터는 자유로워졌지만, 67세 노동자는 목숨을 잃었다.


우리 사회는 노동인권 사각지대의 정화를 위해 피를 요구한다. 목숨을 달리 한 사람들이 없다면, 더위에 취약하며 추위에 무방비인, 지독한 그곳을 개선하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발전소에서 24시간 일주일 내내 돌아가는 컨테이너 벨트에 한 청년이 빨려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전국의 발전소에선 2인 1조라는 원칙이 무시된 채, 위험천만한 노동을 이어갈 것이다. 지하철 역 스크린도어와 전철 사이 좁은 틈에서 한 노동자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아마 어느 누구도 이들에 주목하지 않았을 거고, 열악한 노동환경은 일말이나마 개선되지 않은 채 언제든지 교체 가능한 우리 사회의 부품으로 쓰이고 말 것이다. 언론과 여론의 집중을 받지 못한 노동자의 희생은 혹서기 얼굴에 맺히는 땀방울처럼 당연하다고 느껴 그냥 지나칠 것이 뻔하다. 쉼터에서 심장이 멎은 고령의 노동자도 이와 비슷하다. 학생모임의 목소리와 언론의 공론화가 이뤄져 비로소 청소 노동자들의 쉼터가 지상으로 올라왔고, 더위를 피할 냉방시설이 들어섰다.


한국 노동 현장은 일일이 거론할 수조차 없이 많고 다양하다. 물론 이 노동 현장의 전체가 앞서 말한 노동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는 아주 일부에 불과해, 그동안 우리 사회가 인지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당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노동 현장에서 희생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서 이에 대해 굳은살이 박여 무감각해져 버린 것일 수 있다. 또 과거부터 이어져온 노동자의 죽음에 놀라는 것이 대수로운 일로 변질돼버린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일 년에 고층건물 신축공사장에서 추락사하는 노동자가 270~300명에 달한다는 통계가 있다. 아마 부상당해서 불구가 된 사람은 더 많은 터이다. 못해도 일주일에 한 명씩은 누군가가 현장에서 죽는다는 말이 된다. 이는 고공 건설현장에 한정된 것인데, 다른 노동 현장까지 모두 포함한다면 그 희생은 상상할 수도 없이 불어날 것이다. 여기서 요지는 우리 사회가 노동의 사각지대가 극히 일부라서 수많은 희생을 몰랐든 간에, 노동자의 죽음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이든 더 이상 이들의 죽음을 헛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현실을 마법사가 아닌 인간의 눈으로 보면서 우리 사회를 깨닫고, 알게 될 필요가 있다. 영화는 초월적인 해결사가 등장해 문제를 해결해주지만, 현실은 초월적인 존재가 없고 결국은 우리가 스스로 문제 해결을 위해 몸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안일하게 대한다면, 결국은 어디선가 또 다른 희생을 요구할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위에 지쳐 곤죽이 된 사람이 쉴 공간에 적당한 냉방기기가 필요하겠구나’ 공감하는 것,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먼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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