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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장병장 Dec 31. 2019

할머니가 눈길에 넘어졌다. 일을 하면서 핸드폰을 꺼놓느라 수술이 다 끝나서야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나의 하나밖에 없는 가족, 가장 소중한 존재가 크게 다쳐 수술할 지경이 됐는데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에 눈물이 났다. 가난해서 눈, 코 뜰 수도 없이 바쁜 내 지경이나 내가 사는 곳이 달동네라 눈이 와도 동사무소에서 매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에는 이제 화조차 나지 않았다. 눈치 없이 펑펑 내리는 눈에 화가 났다. 커플을 비롯해서 겨우 몇 명 행복하려고 내린 눈에 우리 할머니가 쓰러졌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마저 우리 편이 아니다. 눈은 그냥 개자식이다.


“할매, 괜찮아?”

“괜찮아. 요놈아 가서 일 봐라 늙어서 넘어진 게 뭐가 큰 대수라고”

병원비가 만만치 않아 수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고 며칠을 비웠다고 집은 겨울왕국이 되어있었다. 집안 곳곳은 얼어붙어 한기를 뿜어냈다. 석탄을 연거푸 땠을 때 비로소 집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할매, 이제 따뜻하지? 안 춥지? 추우면 말해”

“아주 뜨뜻하다. 걱정하지 말어”

“에휴 나는 엄청 춥다. 추워”

나는 할머니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할머니 품속이다. 밖은 살을 에는 추위였지만 할머니의 품 안은 너무나 따뜻했다. 다 큰 손자의 재롱이었지만 할머니는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최근에 일을 치여 새벽부터 나가 새벽에 들어오니 할머니와는 얼굴 마주친 적도 없었다. 지금 이 시간이 잠깐이지만 기분 좋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나 오늘 일 쉰다고 할까?”

“이놈아 네가 일을 쉬면 나는 뭐 먹고 사냐? 어여, 나가”

꿈에서 깨기 싫지만 오늘까지 일을 쉬어버리면 생활에 문제가 생긴다. 할머니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트집을 잡으며 일에 나오라는 사람들이었다. 오늘까지 일을 쉬어버리면 내 자리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겨울이라 다시 일을 구하기도 힘들다. 아쉽지만 이젠 꿈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다.


나가려고 옷을 잔뜩 껴입고 문을 나서자 앞에 익숙한 두 사람이 서있었다. 할머니가 다쳤을 때 처음으로 알아채고 수술이 끝날 때까지 옆에 있었던 교회 집사님들이었다.

“어머, 마침 계셨네요. 여기 이거” 집사님들은 우편물을 건넸다. 아마 우리가 집에 없었을 때 집에 종종 들러 청소를 해주셨는데 그때 보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군대 영장이 나왔어요. 경훈 형제 이제 군대 더는 미룰 수 없죠? 말이 나온 김에...” 편지에는 나라에서 나를 언제, 어디로 데려갈지 적혀있었다. 망치에 맞은 듯 갑자기 머리가 띵해졌다.


“경훈 형제? 할머니가 연로해서 부러진 곳이 아물기 어려워요 또 꾸준히 재활도 해야 하구요. 경훈 형제 군대 가면 권사님은 누가 돌보겠어요? 우리가 도를 넘는 것 같긴 하지만 이제 그만 권사님을 우리 교회에 맡기는 거 어때요? 우리가 아는 요양원이 있으니까. 비용은 우리가 도와줄 수 있어요” 집사님들이 건넨 요양원 전단지에는 할머니 또래의 노인들이 밝게 웃고 있었다.

“예 예, 잠시 만요.” 나는 얘기를 끊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집사님들의 입에선 구구절절 맞는 얘기들이 쏟아졌다. 내가 군입대를 앞두고 있다는 것도 할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도 틀린 말이 없었다. 나와 할머니를 위한 이야기였지만 왜인지 모르게 분한 마음이 들었다.


일을 나오라는 전화도 무시하고 동네를 하염없이 걸었다. 굽이굽이 진 골목길에 빽빽한 집들 중에 빛을 뿜어내는 집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갑자기 화가 나 미친 듯이 동네를 뛰어다녔다. 뛰면 좀 나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얼마 못가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져 버렸다. 우리 할머니를 넘어뜨린 눈길은 그대로였다. 다시 일어날 힘이 없어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엔 또 눈이 왔다.

“아 씨 또 눈 오네” 오늘도 화낼만한 곳은 눈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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