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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장병장 Feb 17. 2020

기본이 무너진 곳에서

사람들은 한 곳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는 연기를 내뿜는 무언가가 떨어지고,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그곳으로 달렸다. 행렬 중 몇몇은 피를 봤다. 철조망 뾰족한 가시 끝에 피가 맺혔다. 그래도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피아는 남편과 함께 멕시코 국경마을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소피아는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근처의 폐해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권력은 부패했으며, 시민들은 언제나 폭력에 노출돼 있었다. 가끔씩 서로 다른 조직원들의 싸움이 생길 때면, 마을에서는 총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결국은 다리 아래 죽은 시체가 매달려서야 싸움은 잦아졌는데, 그 모습은 이로 말할 수가 없었다. 총과 마약 그리고 부패함이 들끓는 곳에서 소피아는 무능했다. 그곳에 순리에 맞게 사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다 소피아의 몇몇 친구들은 무력함에 못 이겨 철책을 넘었다. 미국으로 떠난 것이다.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들은 시간이 지나 하나둘씩 소피아에게 연락을 해왔다. 그들은 미국에 가서도 빈곤함을 면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다리 밑 시체와의 조우를 피할 수는 있었다.


소피아는 미국으로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인 로드리게스가 이 곳의 경찰이었기 때문이다. 경찰이라고 모든 폭력으로부터 자신과 소피아의 안전을 담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믿을만한 구석이 있었다. 바로 경찰과 조직원들의 결탁이었다. 국경마을에서 선출된 권력은 조직원들과 함께하는 엘리트들이거나 이들을 대변하는 세력이 전부였다. 이외의 무언가가 힘을 모아 권력을 탈환 하려는 시도를 하면 총으로 무장한 사내들이 찾아갔다. 그리고 시체가 마을에 나뒹굴었다. 위에서부터 흐른 물이 맑지 않은데, 아래라고 다를까. 경찰은 조직원들의 또 다른 자경대원들이었다. 경찰은 마약을 직접 운반하는 것은 물론이고, 중앙정부에서 내려온 수사기관의 그물망을 풀어헤치는데 앞장섰다. 여기서 말단 경찰이었던 로드리게스는 주로 마약을 운반했다. 소피아와 로드리게스는 이 부정한 진실에 기대어 살아갔다. 그녀가 끔찍한 곳에서 아이 둘을 낳은 것도 그의 남편이 경찰이지 않았더라면, 경찰이 부패하지 않았더라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던 중 소피아와 아이들을 지켜주던 우산이 벗겨졌다. 로드리게스가 폭력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게 씌워주던 검은 우산이 사라져 버렸다. 로드리게스와 경찰은 서로 다른 조직의 알력 다툼에 휘말렸다. 그래서 공권력은 선택을 해야 했고, 선택의 결과와 책임은 폭력으로 되돌아왔다. 무작위 한 폭력 앞에 경찰이 당할 도리가 없었다. 새로운 조직은 빠르고 유능했으며, 무엇보다 잔인했다. 적이라면 노인과 여자, 아이들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총구를 겨눴다. 거기에 로드리게스가 포함됐다. 평소같이 경찰차로 마약을 운반 중이던 그에게 총알이 쏟아졌다. 그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었던 권총 한 자루도, 경찰이라는 지위도 모두 소용없었다.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다행히 로드리게스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동료는 그렇지 못했다. 미처 손 쓰기도 전에 조수석에 타고 있던 동료는 목숨을 잃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한 로드리게스는 동료를 잃었다는 슬픔보다는 덜컥 겁부터 났다. 이곳에서 온전히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자신도, 아내도, 두 아이도 모두 한 순간에 죽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폭력을 실감한 로드리게스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동료의 시체를 부여안고 그는 복수보다는 탈출을 꿈꿨다. 


동료의 장례식이 있기도 전에 로드리게스는 소피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가족을 지켜주던 모든 안전장치는 소용없어졌다. 결국 부부는 부랴부랴 짐을 쌌다. 전쟁은 계속해서 피를 원한다. 가족의 안전을 누구도 담보할 수 없었다. 폭력의 긴 팔이 소피아와 아이들을 품을 수도 있었다. 소피아와 로드리게스는 이른 새벽에 아이들을 깨웠다. 부부의 표정은 비장했다. 아이들의 칭얼거림에도 그들은 단호하게 대응했다. 소피아는 그 순간 엄격하고, 근엄했고, 진지해 보였다. 어린아이들도 그 순간 소피아의 기분과 집에서 흐르는 공기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큰 애와 작은 애는 재빨리 어머니의 말을 따랐다. 최소한의 옷가지와 짐을 채비해 떠날 준비를 마쳤다. 평생을 살았던 집에서 도망치는 듯이 떠나는 것에 불안할 법도 하지만, 아이들에게 감정의 여운을 느낄만한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1분 1초가 흐를수록 비장해지는 부모의 표정에 아이들은 압도당해버렸다. 아이들은 앞으로 다가올 혹시 모를 낯선 폭력에, 어머니의 비장함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해도 달도 모두 고개를 내들기 애매한 시간에 소피아와 가족들은 집을 나섰다. 그녀는 차를 타고 갈까 생각해봤지만, 주위의 시선을 끌 것 같아 이내 포기했다. 이른 새벽에 아이와 함께 집 밖에 나서는 걸 동네방네 소문내 좋을 것은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걸었다. 소피아가 친구들을 떠나보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함께할 수 있었던 철조망이 위치한 곳으로 걷고 또 걸었다. 비몽사몽의 아이들도 칭얼대지 않았다. 남편은 겁에 질린 채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마침내 해가 기웃기웃거릴 때쯤 소피아와 아이들은 멕시코 끝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중개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드리게스의 동료도 한 두 명 보였다.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채 가벼운 목례만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도 중개인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동요했다.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이곳에서 꺼내 줄 구세주를 찾았다. 이제 해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있었지만, 여전히 중개인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구세주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절망과 침묵 끝에 한 사람이 소리쳤다. “저기로 달려갑시다.”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은 미국이 보이는 철조망으로 달려갔다. 소피아와 가족들도 그 뒤를 따랐다.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은 두려울 것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무서운 기세로 행진하던 행렬 속에서 사람들은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사람들과 철조망이 점점 가까워지자 반대편에서 소리쳤다. 짧은 영어였다. ‘멈춰. 그만. 오지 마라. 오면 무력을 사용하겠다.’ 행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행됐다. 결국 철조망 앞에 다다른 사람들이 절규하며 소리치자 무언가가 날라 왔다. 총소리도 함께 들렸다. 사람들을 향하지는 않았지만,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로드리게스는 철조망에 바짝 붙어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자신이 경찰임을 증명했다. 미군은 개의치 않았다. 로드리게스가 멕시코에서 폭력 조직원에게 당한 것처럼 미군 또한 그에게 총구를 들이밀었다. 무질서한 곳에서 공권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소피아는 절망했다. 자신과 가족들을 허락하지 않는 미국의 태도에 절망했다. 서러웠다. 그리고 슬픔이 차올랐다. 그때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렸다. 사람들이 마구 뒤엉키기 시작했다. 소피아는 본능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행진의 방향을 꺾었다. 동시에 로드리게스를 큰 소리로 불러 손짓했다. 그녀는 아이들과 냅다 달렸다. 기본이 무너진 곳에서 슬픔은 사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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