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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장병장 Apr 01. 2020

인생 최고의 순간

학생들이 등교하기 아주 전, 논밭에 해의 정수리가 살짝 걸렸을 아침 일찍부터 순이는 학교에 와 있었다. 반을 쓸고, 닦고, 마치 구두에 광을 내는 것처럼 순이는 반에 미화를 신경 썼다. 그러더니 어디서 나를 몰래 보았는지, 몇 개월 전부터는 내가 학교에 다른 선생님들보다 일찍 온다는 걸 알고 순이는 교무실에 나를 보러 왔다. 반에서는 반장을 맡으며 친구들을 이끌던 여장부였지만 싱그럽게 웃으며 ‘선생님’하고 나를 따를 때는 영락없는 초등학생이었다. 어느 날 나는 문뜩 궁금해서 순이에게 물어봤다. 왜 그리 학교에 일찍 오는지를.

“선생님도 좋고, 학교도 좋고, 집은 싫고”


순이는 오늘은 눈에 퍼런 멍을 간직한 채 학교에 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순이를 보니 더욱 가슴이 아팠다. 이 작고 소중한 아이를 손댈 때가 어디 있다고, 그렇게 모질게 대하는지. 한 달 전, 나는 순이의 종아리와 팔뚝에 보랏빛 멍이 슬쩍 보여 놀란 눈을 하고 물었다. 아이는 우물쭈물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머니가 도망갔다고, 아버지의 손찌검을 이기지 못하고 꼭꼭 숨어버렸다고. 뒤에 여운을 남긴 대답은 순이의 종아리와 팔뚝이 대신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선생님, 얼마 안 있으면 못 그러겠죠.”


몇 개월이 지나 낯보다 밤이 더 길어질 무렵, 순이는 며칠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내가 순이 아버지에게 가정방문을 예고하는 전화통화를 한 다음 날부터였다. 순이아아버지가 술에 취해 꼬부랑 혀로 나를 욕할 때 옆에서 절규하던 순이의 목소리가 통화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도 학교는 꼬박꼬박 나오던 아이가 결석하는 게 몹시 마음에 걸려 시골 동네를 수소문했다. 조그마한 동네에 순이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마을 사람들은 “마누라도 잡더니, 이젠 애도 잡겠어.”라고 운을 뗐다. 그리고 묻지도 않았던 순이네 식구의 이야기를 늘어놓은 후에야 비로소 이들은 순이네를 알려줬다.


순이네는 고요했다. 차분한 것을 넘어 엄숙하게 느껴졌다. 순이를 큰 소리로 몇 번 불렀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창문 사이로 집안을 살펴봤지만 불이 다 꺼져있어 어두컴컴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직 온기를 잃지 않은 연탄을 보고  행여 순이가 돌아올까 봐 한 시간을 꼬박 기다렸다. 그러나 나는 순이도, 순이 아버지도 볼 수 없었고 결국 해가 질 무렵 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집 근처 골목 어귀에서 쪼그려 앉은 순이가 보였다. 나는 한걸음에 순이에게 달려갔다. 순이는 아침과 같은 표정을 하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말했다.

“이젠 괜찮을 거예요. 다 좋아질 거예요.”


따뜻한 온돌방과 코코아도 순이의 떨림을 멈추지는 못했다. 내가 덮는 이불까지 챙겨줬지만 순이는 계속 추운지 몸을 덜덜 떨었다. 무슨 연유인지 물어도 아이는 같은 괜찮다는 말과 좋아질 거라는 대답을 반복했다. 나는 얼마를 씨름하다가 순이에게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혼자 마루에 나와 생각을 곱씹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교차할 즈음 날카롭게 전화벨이 울렸다. 재촉하는 수화기를 들어 귀에 갖다 대고 마음이 턱 하니 떨어졌다. 심장은 보다 빨리 뛰었다. 수화기 너머는 경찰이 순이 아버지가 연탄가스를 마시고 죽었다고, 순이를 찾았다. 그러던 중 나는 방안에 순이와 눈이 마주쳤다. 순이는 나를 향해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순이의 떨림도 어느새 멈춰있었다. 

"왜요? 아빠가 죽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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